조명이 꺼지고 새하얀 스크린이 떠오른다.
단조로운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감독의 친필 손글씨 제목이 떠오르고 제작진 이름이 몇 개 더 떠오른 뒤, 나는 바로 영화의 프레임 속으로 진입한다. 카메라가 비추는 대로 공간이 나오고 그 안에서 인물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첫 장면부터 나는 위안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편안함, 안도감, 안전하다는 감정. 그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향수를 느끼는 걸까. 현실은 해답이 정해져 있지 않고 시간은 흐른다. 하루하루를 기우뚱거리며 살다가, 영화관 스크린 안에서 시간이 정지한다. 흔들리고 불안정한 삶도 잊힌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점점 맑고 투명해진다는 인상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단순해지는 게 맞는 것 같다. 누군가 말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 사는 거라고. 젊을 때는 삶에 무지해서 헤맨다. 모르니까 심각하게 무게 잡고 아는 척한다. 어쩌면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때가 노년인지 모르겠다. 어느 정도 살아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 삶은 사실 별거 아니라고. 태어나서 죽는 게 인생이고 그 안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문제라고. 이런 철학자스러운 대사들은 아마도 감독이 살면서 터득한 것이겠지.
삶이 뭐냐, 사랑이 뭐냐, 심지어 진리가 뭐냐, 작심한 듯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퍼붓는 청년에게 늙은 시인은 말한다. 모르는 거라고. 그게 뭐다,라고 그럴듯하게 말하는 책들은 전부 오답을 말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다. 우리는 말을 잘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세상에 확실한 건 없는데 다 아는 것처럼 단정 지어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개 사람을 홀리는 언변을 가지고 있다. 사이비종교 교주들처럼.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가 나란히 진행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각 이야기는 공간도, 인물도 다르며 한 번도 겹치지 않는다. 그러나 뭔가 묘하게 겹친다는 심증이 간다. 상원(김민희)과 의주(기주봉)는 라면에 고추장을 타서 먹는, 일반적이지 않은 취향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각각의 에피소드는 상원과 의주가 침대에 올라 잠을 청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의주에게는 오래전 기르던 고양이가 있었는데 죽었고, 상원이 머무르고 있는 정수의 집에는 ‘우리’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산다. 전직 배우인 상원은 연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지수(박미소)로부터 연기에 대한 질문을 받고 기나긴 답을 해주고, 노시인인 의주는 자신을 동경하는 문학청년 재원(하성국)의 질문에 답을 해준다.
대본은 감독이 썼겠지만, 상원이 들려주는 연기론은 실제 김민희 배우의 이야기로 들린다.
이제 그의 영화의 인물들은 커리어와 삶에서 나온 지혜를 들려주는 나이가 되었다.
전작들처럼 이 영화에도 홍상수 감독의 페르소나를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 그 인물을 통해 그의 현재진행형 관심사와 인생관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70대에 접어든 시인인 의주가 그런 역할을 한다. 그는 최근 들어 갑작스럽게 청년들의 관심을 받게 된 시인이다. 그에게 특별히 꼰대스러운 지점은 보이지 않는다. 졸업 작품으로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하는 기주(김승윤)에게 기꺼이 촬영을 허락하고, 그를 동경하는 청년의 방문도 가볍게 허락하며 그가 퍼붓는 진지한 질문에 성의껏 대답한다. 심장이 좋지 않은 그는 의사의 경고대로 좋아하는 술과 담배를 끊었는데, 술을 사 오겠다는 재원의 말에 흡사 불량식품 사 먹는 걸 엄마에게 허락받은 아이처럼 기뻐한다. 가위바위보 게임을 자식뻘인 그들에게 제안하고 즐긴다.
최근 영화에서 청년들이 많이 등장하는 건 그의 영화가 늙지 않았고 젊은 세대와도 소통한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관객과의 대화에서 홍상수 감독의 디렉션 스타일을 들을 수 있었다. 현장에서 그날 분의 대본을 즉흥적으로 쓱쓱 써서 준다든가, 실제로 어마어마한 양의 술을 배우들에게 먹여 연기를 시킨다는 (이건 사실이다. 나는 만취한 게 확실해 보이는 배우들이 그 상태에서도 대사를 외우고 연기하는 걸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면서 그들의 대단한 직업의식에 감탄하곤 했다. ) 등의,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 중에서 일부(정확하게는 전자)를 수정해야 했다. 여느 영화감독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완성된 대본이 존재하며, 배우들은 철저하게 대본에 따라 계산적으로 대사와 연기를 한다고 했다. 콘티 하나하나까지 정확하게 준비한다는 완벽주의자 봉준호 감독의 반대편에 서 있는 감독이 홍상수 감독이 아닐까 했는데 그게 편견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영화 중반에 나오는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누가 뭘 내느냐까지 정해져 있었다고 했을 때는 관객석에서 탄성과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 장면에서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실제 게임을 하는 건 줄로만 알았는데.
GV 중에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빈자리 없이 꽉 찬 객석의 상당 부분은 젊은 남성 관객의 차지였다. 관객 질문 시간에 손을 든 관객도, 질문을 한 관객도 젊은 남성 관객이 여성 관객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들이 홍상수 영화의 어떤 지점을 좋아하는지가 궁금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객석에서 여러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경쟁을 뚫고 예매에 성공한 관객들 대부분이 그의 영화 팬들이어서, 거기에 영화제의 열기가 더해져서 그랬을 것이다. GV에 나온 배우들이 마지막 인사에서 부탁한 n차 관람을 실행에 옮기려고, 영화의 전당 인디플러스에서 두 번째로 관람했을 때는 상영 시간 내내 객석이 조용했다.
영화를 일시 정지하고 받아 쓰고 싶은 대사들이 많았다. 특히 늙은 시인이 나오는 장면에서.
그 밖에도 사람보다 동물에게 애정을 쏟는 정수(송선미)나, 식물과 교감하는 상원을 통해, 어떤 대상의 본질과 마주하는 데 있어서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의주가 한 말들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의주는 혼자 옥상에 올라가 맛있게 담배를 피우고 술잔을 기울인다. 쓸쓸해 보이면서도 한편 자족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