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에어쇼, 그리고 글쓰기

by 들국화


티빙에 드라마 <파친코>가 올라와 있는 걸 뒤늦게 알고 보기 시작해서 정주행하고 있다. 오늘 시즌 1을 끝내고 시즌 2를 시청 중이다. 드라마가 한창 인기를 얻을 때 서점 매대에 쌓인 원작소설의 앞부분을 읽다가 이내 책장을 덮은 기억이 있다. 우리 근대사를 다룬 이야기가 번역체라는 점이 어딘가 어색했다.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우리 역사를 소재로, 미국을 비롯한 외국 독자를 겨냥해서 한국계 미국인이 영어로 쓴 소설. 그런 선입관이 있었던 것 같다.

소설은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드라마 <파친코>는 내 선입견과 달리 한국적인 것을 어설프게 흉내 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의 실상과 재일조선인의 삶을 공들여 재현하여, 디테일 하나하나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 사투리까지도 생생했다. 알고 보니 한국사, 일본사, 제국주의 연구자들에게 자문을 받았다고 한다. 드라마 전반부의 어떤 장면들은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떠올리게도 했다. 4대에 걸친 장구한 시간을 넘나드는 구성에, 인물마다 서사가 충분히 주어져서 대하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드라마 정주행이 끝나면 원작소설도 다시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시즌 2의 2화를 보다가 스스로 제동을 걸었다. 식사 준비를 빼고는 움직이지 않고 드라마만 봤더니 머리가 아팠다. 아들은 데이트하러 나가고 에어컨을 켜놓은 방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난 남편은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느지막이 나왔다. 스타벅스를 향해 걷는데 형광색 티셔츠 차림의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밤에 광안대교를 달리는 나이트레이스 행사에 관한 기사를 본 게 떠올랐다. 그게 오늘이구나. 내가 집에서 뒹굴뒹굴하는 동안 밖은 환한 햇빛만큼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주말과 휴가를 즐기러 나온 인파 속을 나는 노트북이 든 가방을 메고 걸었다. 형광색 티를 입은 사람들 속에서 나만 흑백 사진 같았다. 마침 입고 있는 원피스도 검정. 걷다 보니 이상했다. 사람들이 해안의 펭귄 떼처럼 일제히 바다를 향해 서거나 앉아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올려다본 하늘은 별다른 조짐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2층에 올라갔다. 사람들로 꽉 찬 실내에 빈자리 하나가 눈에 들어와 얼른 자리부터 잡았다. 그때 창 쪽에서 탄성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굉음이 들렸다. 에어쇼라고 했다. 탄성이 들릴 때마다 고개를 돌려봤지만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비행기 몇 대가 하늘을 나는 것뿐이잖아, 하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음료가 준비됐다는 알림이 와서 내려갔다.


음료를 받고 밖을 내다보니 매장 앞 데크에 사람들이 모여 서서 하늘을 향해 핸드폰을 치켜들고 있었다. 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유리문 안쪽에서 무심히 밖을 내다보았다. 굉음과 함께 뭔가 지나갔다. 사람들의 고개가 그것을 따라 움직이며 탄성을 질렀다. 하늘에 색색의 꼬리가 남았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비행기는 이마 바로 위에서 황금색 몸체를 과시하며 출현했다가 아주 높고 멀리 점이 되어 날아갔다. 그리고는 한참 뒤에 다시 한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조종사는 비행기 몸체를 360도로 뒤집는 묘기를 선보였다. 나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바라보는 방향에 시선을 고정하고 다음을 기다렸다. 나중에는 나도 사람들을 따라 핸드폰을 들어 동영상을 찍었다. 동영상 촬영에 미숙해도 최대한 끌어당겨서 찍어 보았다. 마침 글쓰기 단톡방에서 메시지가 올라와서 동영상을 올리고 가족방에도 올렸다.






2층으로 올라왔다. 어느새 두통이 사라져 있었다. 역시 일단 집 밖으로 나와야 하는구나. 우연히 진기한 구경도 하고 사람들이 주는 에너지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글도 써진다.

사실 요 며칠 기분이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럴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었다. 표면적인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혼자 속을 끓이는 쪽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글쓰기에 대한 회의도 스멀스멀 일어났다. 집은 그런 생각이 들러붙기 좋은 환경이다. 그런데 한껏 위축되어 있던 마음이 글을 쓰기 시작하니 어느새 괜찮아져 있다.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저 자신을 위해서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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