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내안의 관찰자 키워나가기

by 엘렌D

안전한 말로 살아남기

직장생활의 지혜 중 하나는 상대방에 따라 적절한 말을 꺼내는 것이다. 나를 과하게 드러내지 않고 책 잡힐 이야기는 피하면서, 아무도 관심 없지만 모두가 관심있는 척 할 수 있는 무난한 소재를 슬쩍 꺼내는 것. 그것이 직장인에게 요구되는 프로페셔널한 스몰 토크 스킬이라고 배웠다.


주말 이야기, 날씨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은 두 번 걸러낸다. 그리고 많은 순간 큰 숨을 쉬며 목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조용히 눌러 담는다. 말의 내용보다 화자의 마음보다 안전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법을 아는 것. 우리는 이렇게 안전하게 살아남는다.


말을 거를 필요가 없는 사람들

우리 임원은 주식 고수다. 특정 종목을 진득히 관찰하다가 저점이다 싶으면 한 번에 수억을 매수한다. 우리가 아는 한 그 분이 투자한 주식은 백전백승이었다. 그의 주식투자 영웅담을 들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한 리액션뿐이다. "와 하루에도 몇 천만 원이 왔다갔다 하시네요!" "일이천은 돈으로도 안 보이시겠어요." "그렇게 몇 억을 버셔도 포커페이스인게 제일 멋있어요!"


차기 임원으로 거론되는 모 팀장은 계엄 정국에도 스스럼없이 자신의 정치관을 드러냈다. "이런 시기일 수록 XXX(정치인)은 좀 얌전하게 있어야하는 거 아냐?" 온라인 회의 중에는 타 팀 팀장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말하는 건 다 좋다고 하시잖아요. 제가 XXX(정치인) 어떠냐고 해도 좋다고 하실거죠?" 분명 회의중에 한 말이었다.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자리에서 시끄럽게 던져진 말이었다. 난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원색적인 그 권력이 부럽기도 했다.


자신의 밑천을 그대로 드러내고도 뒷탈이 없을거라 자신하는 것, 그게 바로 권력이다.

어떻게 보일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 그 무감각함 역시 권력이다.


권력의 흐름을 확인하는 시간

그들은 어쩌면 이미 잘 아는지도 모르겠다. 수십, 수백 번 같은 에피소드를 반복하며 말해도 우리는 늘 처음 듣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경청한다. 모두가 듣고 보는 회의 자리에서 보란듯이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태도에는 결국 하나의 생각이 깔려있다. '너희는 아무 말도 못 하잖아.'


그들은 권력을 알고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발화하는 시간은 대화를 주고 받는 시간이 아니라 권력의 흐름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권력을 지닌 자들은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힘을 조용히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마디로 입을 조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 무슨 말을 해도 반박이 없을 것이라 확신하는 사람들, 언제 어디서든 자기 말의 결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권력은 말을 거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자리한다.



부끄러움의 상실

말은 할수록 그 사람의 결을 비춘다. 특히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무감각하게 던져진 말은 그 사람의 약점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어느 시점에서 사고의 성장이 멈추었는지, 얼마나 좁은 세계에 스스로 갇혀있는지 그들의 말 속에 모든 것이 배어있다. 나의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무게로 꽂힐지 상상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개의치 않음'은 부끄러움을 감각하는 능력을 잃었다는 반증이다. 부끄러움을 잃으면 편해지지만, 그 편안함은 감각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부끄러움은 어른이 되는 데 필요한 마지막 감각이다. “부끄럽다”는 감정이 살아있다는 건 아직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돌아보는 사람은 이미 성찰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성찰이 가능한 사람은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될 여지가 남아있다. 그 여지가 마음을 조심스럽게 만들고 그 조심스러움이 결국 한 사람의 품위를 만든다. 그래서 부끄러움이 남아 있는 사람은 권력을 갖지 않아도 자신의 품위를 지켜낼 수 있다.


권력도 무엇도 없는 나는 내면의 관찰자를 키워나간다.

누군가가 자신이 지닌 권력의 흐름을 확인하는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지만 그들처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말 대신 사려 깊은 시선을 다듬고, 반박 대신 마음의 결을 침착하게 다져 나간다. 속으로 삼켜낸 이러한 순간들을 먹이삼아 내 안의 관찰자는 자라난다. 그렇게 자란 관찰자는 이 조직 안에서 내가 가야할 길을 조용히 비춰주는 불빛이 될 것이다. 어둡고 흔들리는 바다에서도 권력의 무감각함에 휩쓸리지 않고 나아가도록 버텨주는 단단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조심스럽지만 너무 늦지 않게 나는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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