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목이 실력인 조직

실력의 정의가 바뀌는 순간

by 엘렌D


대기업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배운 건, 실력의 정의가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스타트업에선 투명하게 공개된 소통, 조직 대 조직 간의 공식적인 협업, PM과 프로젝트원 사이의 명확한 책임이 실력의 기반이 되었다. 스타트업은 하룻밤 사이에도 사람이 갈려 없어지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인수인계 시간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언제든 백업할 수 있도록 자료를 공유하는 것이 생존의 방식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정보는 슬랙에 남았고, 메일에는 관련자가 빠짐없이 참조되었으며, 필요한 정보는 누구든 검색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누가 어떤 일을 맡는지, 어떤 요청이 오가는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한 스타트업의 협업은 공식적이고 투명했다.


그런데 이곳은 달랐다. 대기업에서 실력은 종종 ‘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업무 요청은 기록이 남는 공식 채널이 아니라, 조용한 목소리로 걸려오는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다.

“내가 그 부서에 친한 사람 있으니까 물어볼게.”

때로는 누가 더 그 부서와 가까운지, 더 인맥이 두터운지를 두고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친목 네트워크는 근무 시간이나 사무실 안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흡연실, 휴게실, 퇴근 후 술집, 스크린골프장 같은 공식 업무 공간을 벗어난 곳에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당장 그 자리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이 내려지지 않더라도, 비공식적 만남을 통해 쌓인 관계와 유대감은 결국 업무에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친목 네트워크는 공식적인 절차나 시스템보다 업무의 방향과 결과를 좌우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룹 연수원 사용을 위해 공식 사이트에서 예약 신청을 했다. 2주가 지나 시스템 상에서 예약이 된 것을 확인했고, 모든 절차는 문제 없이 진행되는 듯했다. 그런데 교육 일주일 전, 확인차 전화를 걸었을 때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아, 그날은 이미 다른 교육이 예약됐는데요?”알고 보니 담당자와 친한 누군가가 내가 신청한 날짜를 선점한 것이었다. 공식 시스템을 통해 예약을 완료했음에도, 결국 결정권을 가진 건 시스템이 아니라 관계였던 것이다. 심지어 400여 명의 경력직이 참가한 교육에서 대표이사님 또한 “전화로 할 수 있는 용건을 괜히 문서화해서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충고를 전해주시기도 했다. 결국 이곳에서의 진짜 실력은 기록되지 않고 측정할 수도 없는 ‘관계’라는 이름의 힘이다.


실력의 정의가 바뀌면, 주니어의 성장도 바뀐다

무엇을 실력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주니어를 육성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스타트업에서는 신입이 들어오면 곧바로 실전에 투입다. 당사자는 하루에도 수백 통씩 쏟아지는 참조 메일을 따라가야 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업무 흐름을 스스로 캐치해야 한다. 답을 찾기 위해 슬랙을 뒤지고, 드라이브를 검색하며, 운이 좋으면 누군가 남겨놓은 노션 매뉴얼을 발견한다. 결국 모든 것은 자기 손으로 찾아내고, 스스로 업무를 완성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곳에서 실력은 ‘얼마나 빨리 맥락을 파악하고,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는가’로 정의된다.


반대로 대기업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신입은 각 부서의 키맨들과 차례로 자리를 가지며, 업무 내용보다 서로의 얼굴을 익히는 데 집중한다. 이는 선배들이 건네는 일종의 배려다. 본격적인 업무 투입 전까지 긴장을 풀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동시에 앞으로 일을 해나가는 데 필수적인 ‘안면 트기’를 미리 마련해주는 것이다. 실제 업무에 투입된 이후에도 스타트업과는 결이 다르다. 업무 중 문제가 생기면 매뉴얼을 펼쳐 설명할 때도 있지만, 더 자주 들리는 말은 이렇다. “OOO에게 전화해봐.” “내가 얘기해놨으니까 이제 될 거야.” 여기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이다. 시니어들의 인맥에 기대어 길을 찾는 것이 이곳의 생존법이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혼이 나기도 한다.

“그거 ㅁㅁㅁ한테 연락하면 바로 될 걸 왜 혼자 답답하게 메일로 묻고 있어?” 관계망의 넓이와 친목의 깊이가 곧 문제 해결 능력이 된다. 이곳에서는 시스템을 성실히 따르는 것보다, 사람을 통해 길을 찾는 유연함이 더 중요한 실력으로 여겨진다.


네트워크 없는 경력직으로서, 나는 이 구조 속에서 어디에 서 있는가?

경력직으로 입사한 나는 이 조직에서 네트워크가 거의 없다. 그래서 그저 내 방식대로 시스템을 믿고, 매뉴얼을 찾고,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친절한 선배들은 “내가 전화해줄게.”라고 먼저 말했다. 정중한 배려이지만 동시에 이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은근히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했다. 회식 자리도 많았다. 팀 회식, 실 회식, 사업부 회식, 유관부문 회식, TF 회식…. 8년의 경력동안 회식이 없어도 일하는 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던 나는 회식에 불참하는 날이 많았다. 무엇보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회식은 ‘실력’이라며 참여를 권유받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곳에서 말하는 실력은 내가 생각해온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이 아니라, ‘누구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가’였다. 그리고 나는 그 전화번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친목이 실력인 조직의 명과 암

친목이 강한 조직에서는 ‘누구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능력’이 곧 실력이 된다. 갈등을 피하고, 조용히 대세에 순응하는 사람이 조직 내에서 ‘탄탄한’ 인맥을 쌓게 된다. 이런 조직은 단일대오로 뭉치는 힘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양성이 사라지고, 변화에 저항하게 된다. 특히 이런 친목 중심 조직일수록 눈에 띄는 현상이 있다. 바로 ‘30년산’ 장기 근속 리더가 많다는 점이다. 이들은 과거의 성공 경험과 익숙한 관행에 깊이 익숙해져 있다.

“30년 가까이 이 조직에 있어보니까…”
“이게 우리 방식이야.”

이런 말로 새로운 시도에 소극적이거나 노골적으로 반대한다. 오랜 기간 쌓인 권력과 인맥은 변화가 아니라 현상 유지를 위한 방어막이 된다.


이는 조직문화와도 연결된다. 친목 중심의 조직은 위아래로는 위계 중심, 좌우로는 관계 중심의 문화를 형성한다. 공식 규칙과 절차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상사의 지시와 동료 간의 친목이 업무의 흐름과 결과를 좌우한다. 이런 이중 구조는 때로는 빠른 실행력이나 결속을 만들어내지만, 공식 시스템 밖에서 정보가 돌거나 변화와 혁신이 더디게 이루어지는 한계로 작용한다. 결국 ‘탄탄함’이 ‘딱딱함’으로 변해, 조직 전체가 가라앉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친목의 역설, 사일로 현상

친목 중심 조직의 가장 아이러니한 풍경은 겉으로 보기엔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벽이 점점 두꺼워진다는 점이다. 소수 인맥이나 사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정보와 기회가 오고가는 탓에, 공식적인 협업보다는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려는 분위기가 퍼진다. 팀과 팀, 사업부와 사업부가 각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점점 더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공유되어야 할 정보와 자원은 은밀한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오간다. 결국 친목이라는 이름 아래 뭉쳐진 듯한 조직은 오히려 내부적으로는 사일로라는 단단한 벽에 갇히게 된다.


친목에만 의존하는 조직은 결국 ‘내부자’와 ‘외부자’로 나뉜다. 그들만의 리그에 속하지 않은 구성원은 자연스럽게 배제되거나 소외된다. 기존과 다른 아이디어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조직은 점점 경직되어 외부 환경 변화에 뒤처지게 된다.


모범답안은 없다.

조직마다 적합한 문화와 일하는 방식은 당연히 달라야 한다. 조직의 크기, 구성원, 업종, 리더의 스타일에 따라 실력의 정의는 달라지고, 그에 맞는 시스템과 관습이 만들어진다. 중요한 건 그 기준을 명확히 하고 구성원들이 그 기준을 이해하도록 돕는 일이다. 실력의 정의가 불분명하면,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규칙을 추측하며 소모적인 경쟁에 빠지게 된다.


조직이 필요로 하는 실력은 ‘누구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조직이 원하는 진짜 실력은 공식적이고 투명한 협업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고 조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회사 안에서 나 역시 함께 성장하길 바라는 내가 생각하는 실력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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