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떠나보낸 아버지를 보는 일
2년 전 쯤 혼자 지내시는 할머니께서 약간의 치매 증상을 보이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제외한 8남매 모두가 요양병원에 할머니를 모시는 쪽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고민을 하시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씀과 함께 하시던 일을 모두 정리하신 후 할머니가 계신 시골로 들어가셨다.
그 후 아버지는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식들로 삼시세끼를 꼬박 차려드리고, 트럭을 타고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절과 꽃이 많은 공원들을 손을 꼭 잡은 채 방방곳곳 함께 찾아다녔다.
그 덕분에 할머니는 여든이 훌쩍 넘은 연세에도 식당에 가시면 밥 공기를 싹싹 긁어 드셨고, 아버지와 함께 낮은 산도 타실만큼 건강하셨다.
가끔 할머니가 아버지를 못알아보셔도, 스스로 누구신지 깜빡하셔도 아버지는 개의치 않고 할머니 당신이 누구인지, 본인은 누구인지 계속 말씀드리며 그렇게 꿋꿋하게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랬던 할머니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을 때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건 당연하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2년 동안 할머니를 위해 했던 수많은 노력은 생각하지 않고, 할머니가 고집을 피우시면 “이러면 나 엄마는 집에 두고 군위로 돌아갈거다”라며 모질게 이야기했던 것이나, 더 좋은 곳에 모셔가지 못했던 것 등을 이야기하시며 누구보다 힘들어 하셨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문상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며 육개장과 수육과 술을 가져다 드리는 것, 밤새 할머니를 위해 피운 향이 이어질 수 있게 지키는 것, 아버지가 사람을 피해 조용한 곳에 혼자 계시면 기어코 찾아가서 앞에 앉아 조용히 옛날 이야기를 들어 드리는 것 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가장 슬펐던 순간은 처음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마주했을 때나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뵙고 입관할 때가 아니라, 모든 장례 과정을 마치고 할머니 집으로 갔을 때 아빠가 꽃을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 앞 밭에 작게 심어두었던 꽃들을 봤을 때였다.
힘들어하시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당신이 함께 있던 2년이 어머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2년이었을거야”라고 하시며 위로했다. 그건 아버지의 낡은 카메라에 가득한 할머니의 밝은 표정을 통해서도 충분히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우리 할머니는 분명 좋은 곳으로 가셨음에 틀림없다.
앞으로 나는 그 어떤 때보다 ‘있을 때 잘하자’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후회를 덜 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것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