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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이었던 나는 노예였을까?

by 이확위

오늘은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다가 대학원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한 영상에서는 대학원에 대해 여러 명을 인터뷰하며 대학원 생활에 대해 안내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영상은 제목부터 “대학원 가지 마세요.”였기에 자신이 겪었던 대학원 생활의 부정적 내용들이 가득했다.


이제 대학원에서 학위를 마친 지도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여전히 대학교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기에 대학원생들을 매일 마주하게 된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내가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과는 변한 것도, 여전히 변치 않는 것도 있음을 느낀다. 대학원에 대해 얘기하기에는 학과마다 학교마다 나라마다, 그리고 연구실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 내 경험만을 바탕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학원 가지 마세요”라는 영상을 올린 사람도, 내용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만난 지도교수가 흔히 말하는 갑질 교수였기에 대학원 자체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지배적이게 될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다. 그러나 저렇게 자신 있게 모든 이에게 대학원이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은 너무 가벼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영상을 올렸던 그에 비해,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여러 대학교수들을 만났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지도교수와 종종 연락을 하며 꾸준히 좋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지금 연구실의 보스조차도 뛰어난 연구 실적만이 아니라 훌륭한 인품으로 내가 본받고 싶은, 나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자신의 롤모델과 함께 일한다는 점에서 나는 운이 좋은 연구자인 거다. 나는 나의 옛 지도교수와도 이렇게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 내가 있던 연구실에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같은 환경 속에 있어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자신의 성향에 따라 지도교수나 주변인이 좋을 수도/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다. 모든 인간관계에도 잘 맞는 사람/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모든 관계엔 궁합이란 게 있는 거다. (결혼 전 궁합을 볼게 아니라, 대학원을 결정하기 전 지도교수와 궁합을 보는 게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대학원, 내가 있던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대부분 연구실 생활을 한다. 연구실에는 회사처럼 출퇴근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출근은 지켜지지만 보통 퇴근은 지켜지지 않는다. 퇴근은 갈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간 정도라 하겠다. 그런 퇴근이 남들처럼 오후 5-6시가 아니었다. 내가 다녔던 곳은 9 to 10으로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였다. 심지어 토요일에도 나갔다. 종종 가족들이 토요일에도 연구실에 있다는 내게, “토요일까지 해야 해?”라고 하곤 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는 실험들이 토요일에 나간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일은 계속 있다. 실험한 것을 계속해서 있고, 연구실에서 시간을 더 보내는 만큼 더 빨리 일을 끝내는 것이다. 내가 있었던 프랑스 연구소에서는 연구소가 저녁 8시에 닫았다. 야간에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꼭 해야 하는 실험이라면, 연구소장의 승인이 필요했다.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처음 그곳에 가서는 쉬는 날들이 너무 많기에, ‘이러면 실험은 언제 하고 논문은 언제 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곳도 훌륭히 연구를 다 해나가고 있었다. 살펴보니, 애초에 요구되는 실적의 기준자체가 한국만큼 높지가 않았다. 한국 대학원에서는 제1 저자로 논문 3편을 요구했는데, 프랑스 연구소에서 만난 대학원생들은 논문 1편조차 끝내지 않고 졸업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이렇게 한국 대학원 연구실 생활을 하면, 일상이 모두 연구실로 가득 찬다. 가족들이나 친구보다 연구실 사람들만 만나는 시간이 많다. 입학할 때 애인이 없다면, 졸업할 때까지 없을 거라 말하던 선배도 있었다.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연구실에만 속한 생활과 지도교수가 시키는 일들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많은 대학원생들이 스스로를 “노예”라 일컫곤 하더라.


그런데 나도 노예였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노예와 같은 생활일지라도 나는 노예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나는 내가 원해서 했다. 밤 10시에 퇴근이지만, 자정을 넘기는 날도 많았고, 원하는 데이터를 측정하고자 새벽 4시까지 주야장천 기기 앞에 있던 날도 많았다. 토요일 출근? 일요일에도 실험 결과가 궁금해 연구실에 나가 실험을 하곤 했다. “내 연구”라는 생각으로 실험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일(실험)을 하러 나갔다. 그러니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인 거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내가 하던 연구들에 대해 모두 어느 정도 흥미가 있었고, 결과가 궁금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연구해 나갔다. 하고 싶은 연구를 만났다는 점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일들을 했기에 난 노예가 아니었다.


교수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노예였을까? 지도교수님이 시키는 일들은 해야 했다. 지금도 연구실의 교수님이 시키는 일은 한다. 상사가 시키는 일을 하는 건 어느 집단에서나 큰 차이는 없을 거다. 시키는 일들이 불합리하다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는 것은 대학원만의 문제는 아닐 거다. 그러니 그것이 대학원생을 노예로 만들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느꼈던 하나는 교수의 갑질을 떠나, 많은 학생 스스로가 교수에게 의견내기를 두려워한다는 점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지도 교수를 어려워했다. 물론 지도 교수는 절대 쉬운 존재가 아니다.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졸업이 달려있고, 그 이후 추천서 등으로 당신의 앞날이 지도교수의 손 끝에 달려있는 게 사실이고 현실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너무 낮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 옛 연구실에서 한 학생은 교수님이 너무 불편해 교수님이 연구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 다른 문으로 나가곤 했다. 그룹 미팅에서는 너무 긴장해서 거의 기절할 정도 얼굴이 파래지고는 다리가 풀려 쓰러지기도 했다. 나는 꽤나 많은 실패의 경험을 해서인지 대학원이나 연구원의 길이 인생의 단 하나의 방향이라 생각하질 않았다. ‘그랬기에 아니면 관두고 다른 길을 찾아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교수님을 조금은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교수도 밖에 나가면 그냥 평범한 사람이니까.’ 이게 내 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는 연구들에 대해서 주저 없이 교수에게 의견을 말했다. 논문을 쓰면서도 내가 쓴 것을 교수가 고치면, 문서에 다시 코멘트를 달아서 내 의견을 다시 전달했다. 처음에는 교수가 내 의견을 그냥 묵살했다. 그런데 계속되니 내 의견이 반영되기 시작하더라. 그런데 함께 박사를 마친 동기조차, 교수가 고친 것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더라. 그러니 꽤나 많은 경우가 우리 스스로가 을의 위치에 자처해 나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많은 학생들을 본다. 스스로가 자신의 연구에 대해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답을 찾아가려 하는 학생과 실험 결과만 가지고 막히면 사수를 찾는 이가 있다. 자신의 연구임에도 스스로 해결하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이다. 이러한 태도는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성향일 거다. 간섭하는 교수에게 너무 쫀다며 압박받는 학생이 있기도 하고, 지도받는다고 느끼는 학생도 있다. 학생 자율에 놔두는 교수에게 그 자유로움 속에서 연구를 해나가는 학생도 있고, 지도교수가 지도를 안 한다고 생각하는 학생도 있다. 대학원 생활이 노예라 느꼈던 사람들은 아마도 많은 경우,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 억지로 그곳을 버텨내야 했던 사람이라 짐작된다. 이런 생각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든, 난 운이 좋았던 사람인 거고- 이건 지극히 나의 경험만을 바탕으로 한 글이다. 대학원 생활동안 나는 하고 싶은 일들을 했고, 나의 경험 속에서 나는 노예가 아니었기에, “대학원생=현대판 노예”라 언급되는 것이 난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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