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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고 싶은 글 vs 남이 읽는 글

내 글은 왜 장황해지는 걸까

by 이확위

“네가 쓰고 싶은 글은 어떤 건데?”

친구가 물었다. 내가 최근에 가진 글쓰기 모임 합평에서 내 글이 “너무 디테일한 정보가 많다”라는 피드백을 받은 거에 대한 얘기를 한 후였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 2022년 9월 경이었으니, 이제 거의 3년이니 짧다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시간이다. 누구라도 “꾸준히 썼네”라고 할 정도의 시간은 된 셈이다. 스스로의 글을 대해 평가하자면, ‘어휘력이 부족해 읽기 쉬운, 딱히 어떤 통찰력 같은 것은 없는 그저 가벼운 일상 에세이’가 내 글이다. 종종 브런치에서 댓글을 써주시는 분들이 내 글에 대해 솔직하다고 평해줬다. 그들은 그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 ‘솔직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저 내 글에 없는 깊이감에 타인의 글을 읽으며 부러워할 뿐이었다.


에세이를 주로 쓰지만, 내 책장에는 에세이가 거의 없다. 주로 소설을 읽는다. 학창 시절에는 딱히 책을 읽는 학생이 아니었다. 성인이 된 후에야 서점가는 것을 좋아했고, 책을 사는 것을 좋아했다. 샀던 책을 모두 읽었다면 좋았겠지만, 책을 사는 것만으로 내 지적 허영심을 채워줬고- 그중 일부만을 읽었다. 언제나 ‘읽어야지’하는 목표로 삼은 책들만이 가득했다. 처음 책을 조금 열심히 읽던 시기에는 대부분이 최신 베스트셀러를 선택했었다. 주로 외국 번역 소설들로, 일종의 장르소설들이었다. 마지막에 한방이 있는, 해외 어디에선가 드라마로 만드는 작품의 원작인 그런 소설들 말이다. 처음에는 재밌었다. 그러다 문학상을 받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시작이 맨부커상이었다. 맨부커상 수상작들을 몇 편 읽으니, 모두 재밌어서- 이전에 맨부커 수상장들을 검색하고는 그 책들을 읽었다. 그러다 고전을 읽어야지란- 생각으로 순수문학 소설들을 읽었다. '이런 책정도는 읽어야지'라고 허영심을 채워줄만한 그런 유명한 작품들 말이다. 읽을 양이 많은 두툼한 벽돌 같은 두께들이 오히려 좋았다. (좋은 책을 읽다 얼마 남지 않은 페이지는 언제나 아쉬움을 줬으니까.) 처음 순수문학류의 소설을 접하고는 그냥 지나가는 1인 같은 사람조차 상세한 설명들을 보며, ‘뭘 이렇게까지 쓰지?’했었다. 그러나 그런 책을 읽고, 다시 베스트셀러에 있는 부담이 전혀 없는 두께의 장르 소설을 보니- 얕은 캐릭터들의 깊이가 허술하게만 느껴졌다. 순수문학 속 살아있던 캐릭터와 다르게 이들의 캐릭터는 생명을 얻지 못한 느낌이었다.


“디테일에서는 조금 편집증이라 할만한 모습들을 보이네요.”

생각해 보면 내가 쓰는 글과 내가 그리는 그림이 비슷했다. 프랑스에서 알게 된 미술 작가분이 내 그림을 보고 디테일에 대해 말했다. 어쩌면 나의 성향이나 내가 추구하는 것이 디테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림에서는 “하이퍼리얼리즘”을 동경했으니까. 다만 하이퍼리얼리즘 그림을 보면 ‘우와 대단하다’라고 생각할 뿐 ‘우와 좋다’라고는 느끼진 못했다. 그래서 그림에서만큼은 내가 가지지 못한 테크닉의 동경정도라 생각했다. 글에서의 디테일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순수문학 속에서 나는 어쩌면 대가들이 써 내려간 디테일함이 감탄하며 내가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림에서와 다른 점이라면, 동경을 넘어서 그런 글들이 난 좋았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연습 삼아 쓰는 글들에서 설명을 조금 더 더해가기 시작했다. 설명을 더해가다 보니, 글은 계속해서 길어졌다.


“Free writing”
사전 계획이나 수정 없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빠르게 써 내려가는 글쓰기 방식.
의식의 흐름이라고 설명되기도 함.
의식의 흐름을 잘 활용한 작가로는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잭 켈루악 등이 있다. (by ChatGPT)


나는 내 글쓰기 방식이 “Free writing” 자유 글쓰기에 해당된다 생각한다. 글쓰기에 조금 빠져서 써 내려가던 한 주말에는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오후 4시까지 A4용지로 70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모두 완성했다. 모든 게 경험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것이었기에- 사실 그렇게 창작의 부분이 많지는 않아서 그렇게 써 내려갈 수도 있겠지만, 토해내듯 글을 썼다. 일단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타이핑했다. 타자도 빠른 편이지만, 타자보다도 쓰려는 말들이 나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렇게 글을 써 내려가고, 쓰고 싶은 내용이 많아서 이미 쓴 글을 잘 돌아보지 않는다. 대가들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작가들이 “초고는 쓰레기다”라며 퇴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제대로 퇴고한 적이 없다. 그저 한편을 쓰면, 다음 쓸 내용이 머릿속에 떠오르니 다음 글을 또다시 토해내려 하는 거다.


어제 오래간만에 내가 운영하는 글쓰기 모임의 온라인 정모가 있어 사람들과 화상으로 만나 시간을 정해두고 글을 썼다. 글을 쓴 후, 피드백을 나누는 시간에서 새로 오신 한 분이 내 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한 편에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다

글이 다소 장황하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잘 모르겠다

흥미로운 소재는 많지만, 그저 사실의 나열 같은 느낌이어 아쉬웠다.


표현은 이와 다르게 했을지라도 내용은 이랬다. 어제 피드백을 듣고는 고민이 되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50분간 쓴 글이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2배~3배의 길이였다. 상대적으로 길다고 할 수 있는데, 나는 그게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생략할 수도 있다. 주된 내용만을 위해 사소한 것은 모두 생략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큰 줄기의 주제와 더불어 그 모든 곁가지들을 모두 함께 곁들여 나는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디테일을 살리고 싶었다. 피드백에서 장황하다는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건 조금 충격이었다. 나는 A4 두 페이지반의 글 속에서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내가 이 글을 왜 썼는지가 전달될 줄 알았는데- 내 글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다소 충격이었다.


친한 친구와 이런 피드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친구는 한 명의 의견이 뭐가 중요하냐고 했다. 내게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 지가 중요한 거라 얘기했다. 내가 디테일한 순수문학 같은 그런 소설들을 쓰는 것이 목표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는, 저 피드백에서 지적한 내용이 내가 바라는 글이지 않냐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긴 했다. 내가 추구하는 글을 써 내려가고 그런 글이라고 평가한 것인데, 그 사람은 그게 부정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이, “내가 쓰고 싶은 것”인지, “남이 읽는 글”인지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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