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과잉 (Creativity overflow)이란, 너무 많은 아이디어나 영감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상태를 말한다. 단순히 "아이디어가 많다"가 아니라, 너무 많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오히려 정리나 실행이 어려운 상태를 가리킨다.
최근에 창조적 과잉이란 말을 접하고는 바로 나의 상태라고 느꼈다. 올해 들어, 컨디션이 매우 좋았고- 연구 아이디어에서 끊임이 없었다. 논문들을 한 두어 개 살피면, 바로 그 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니까. 공동연구 제안할 것들에 대해 보스가 물어보면 하루쯤 고민하면 서너 개가 나왔고, 그걸 모두 던져보면 좋다는 답을 얻었다. 공동연구진에게 내 아이디어가 그대로 전달되면, 나름 대가인 분들이 모두 좋다고 말해줬다. '이게 왜 좋지?'라는 생각에 의아해하곤 했다. 크게 고민해서 얻은 생각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연구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며, 도저히 혼자는 감당을 못하기에 새로 들어온 학생들에게 내 연구 주제를 던져주었다. 하나씩 주고는, 그 학생들이 시간이 조금 여유로워 보이기에 하나씩 더 줘서 4개를 털어냈다. (물론 내가 지도하며 지켜봐야 하지만.) 그런데 4개를 털어내면 5-6개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다시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게 리스트로 적어 내려 간 것만 15개가 넘는다. 아이디어의 홍수 속에 내가 빠져버린 것 같아, 서너 개를 동시에 하다가 이도저도 안 되겠다 싶어- 얼마 전부터 하나씩 빨리 해치우자는 마음으로 집중하고 있다.
이런 과잉상태는 연구에서만 일어나고 있지가 않다. 글쓰기에서도 그렇다. 쓰고 싶다고 적어둔 글들이 한 무더기다. 노션을 이용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모두 정리해 기록해 두는데, 글쓰기를 할 목록들이 한가득이다.
- 마음카드 100장 글쓰기 - 이미 100장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와 글 문구도 다 정리되어 있다.
- 맛집 후기 - 다녀온 맛집들로 브런치 북 한 권 채울 리스트는 모두 정리해 두었다.
- 요리 글- 최근에 했던 것들로 브런치 북 한 권 정도 채울 분량의 내용은 이미 모두 가지고 있다.
- 사랑에 관한 글- 이미 완결낼 정도의 목차는 모두 완성되어 있다.
- 우울과 불안에 관하여- 브런치북을 완결해 뒀지만, 퇴고를 통해 보다 완성도 높게 작업 중이다.
- 그 외에도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많은 것들에서 생각이 확장되어 써 내려갈 글이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이미 쓰려고 계획한 것도 많은데, 계속해서 추가되니- 모두 쓸 수 있을까 걱정만 된다. 말 그대로 창조적 과잉상태인 거다.
문득 다른 이들은 어떨까 싶다. 어느 순간 내가 ADHD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 가지를 한다고 하면 집중을 하니 그건 아닌 것 같다. 그저, 무언가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나- 그 생각을 확인하거나 정리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조금 자주 드는 것뿐이다.
"The first draft of anything is shit."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
헤밍웨이가 말했다. 초고는 쓰레기라고 말이다. 내가 글을 많이 써 내려가고 있지만, 내 글은 언제나 초고에서 멈추고 만다. 다시 돌아보며 완성도를 높일 여유가 없다. 나는 쓰고 싶은 다른 게 너무나도 많으니까. 창작적 과잉 상태에서는 아이디어가 너무 많아서 '완성'보다는 '생성'에 머무는 게 많다더니, 내가 바로 그 말 그대로 인 셈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Focus(집중)보다는 Curiosity(호기심)이 강한 상태가 된다 했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이 미완성 작품을 수십 개씩 남기기도 한다고 말이다.
글쓰기에서의 창작적 과잉은 상관없다. 완성도 적은 글이어도, 글쓰기로 밥 벌어먹는 게 아니니- 어차피 나는 취미로 즐거움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 거니 크게 상관은 없다. 언젠가, 완성도 있게 쓰겠거니-하는 생각으로 지금 떠오르는 것들을 써 내려갈 뿐이다. 문제는 연구다. 이 상태로는 "발견은 많고, 발표는 적은"의 상태가 되어버릴까 두려움이 생긴다. 건드린 건 많은데, 논문 발표까지 이어지질 못하는 상태 말이다. 이대로는 나는 그저,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만 같다.
창조적 과잉으로 아이디어가 많은 것은 좋은 점도 많다. 매 순간 새로운 아이디어가 머리를 활개 칠 때, 그 궁금증에 이런저런 내용들을 찾을 때 나는 정말이지 즐거움으로 가득 차버리곤 하니까. 그러다 그 아이디어가 조금 구체화되고 실천의 시간이 되었을 때, 해야 할 다른 연구들이 쌓여있음과 함께 현실을 자각하며-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이런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멈추게 하고 싶지 않다. 이것들이 멈추는 순간, 연구자로 내가 가야 할 길도 막혀버리는 거니까. 많은 연구자들이 아이디어 노트에 아이디어를 따로 수집해 뒀다고 했다. 아무래도 나도 새롭게 노트 하나를 마련해 아이디어들을 먼저 모두 쏟아내 보고, 그 안에서 정말 집중할 것을 선택해야 할 것 같다. 아이디어는 모두 담아두되, 선택과 집중으로- 생성만이 아닌 완성하는 연구자가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