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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의 붕괴와 확장에 대하여

가수 박진영, 미비포유 영화, 그리고 나의 경험

by 이확위

당신에게 정체성으로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30년째 내 안에 아주 무서운 게 있다. 콘서트를 한다고 했는데 표가 안 팔리는 거 그게 굉장히 무섭다."


어디선가 가수, PD, CEO인 박진영의 인터뷰를 봤다. 한 유튜브에 출연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더라. 그는 지금 자신의 상황에서는 표가 팔리나 안 팔리나, 그가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신적으로 제일 큰 일처럼 느껴진다더라. 표가 안 팔리면 '뭐야 그럼 나 이제 가수 못하냐'싶어서 공연을 못한단 생각 하면 앞으로 남은 삶은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아무리 재산이 몇 조가 됐어도 콘서트를 못하면 나는 죽은 거다. 그런 무서움이 있다."


박진영의 인터뷰를 보며 어쩌면, 프랑스에서 지나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가 그런 기분이었구나.'하고 깨달으며 말이다.


코로나 시즌에 프랑스에 박사 후 연구원으로 일하러 갔었다. 2년 조금 넘게 프랑스에서 지내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내게 프랑스 생활이 어땠느냐 말을 때면 나는 한결같이 말했다.


"연구 빼고는 다 좋았어요."


프랑스에서 연구가 잘 되지 않았다. 프로젝트 주제자체도 나는 전혀 흥미롭지 않았고, 진행이 수월하지 않았다. 될 것 같으면서 되지 않았다. 실험실 밖 생활은 모든 게 좋았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활동을 하며, 한국에 있는 누군가는 내게 인생의 최고 시즌인 거 같다고도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연구가 되지 않는다는 게 내 마음 한편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무언가가 잘되도, 나는 계속 못하고 있다 느껴졌다. 나는 이곳에 연구를 하러 온 것이니까, 연구가 되지 않으니 이곳의 모든 게 실패로 느껴졌다. 남들이 그래도, 다른 것들이 잘되는 거니 의미 있지 않냐고 말하곤 했지만- 그게 내게 와닿지 않았다.


박진영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박진영은 노래하고 무대에 서는 그 순간이 진짜 자신이라 생각한다. 남들이 보기에 괜찮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스스로가 느끼는 자신이 그렇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이다. 나에게는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 나 자신을 "연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박진영이 말하는 두려움이나, 내가 프랑스에서 느꼈던 스스로 실패자라는 기분은 바로, 성공이 아닌 정체성, 존재에 대한 문제인 거다.


예전에 베스트셀러였던 "미비포유(Me before you)"라는 책이 영화화되었다. 그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윌은 자유롭고 활동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자신을 사랑했다. 그러나 사고가 나고 신체적 제약으로 그전과 달라진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닌 상태로 사는 걸 견디지 못한다. 그는 '나로서 살 수 없다면 그건 나의 삶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자 주인공과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그는 삶을 포기하려 한다. 이에 대해 같이 영화를 봤던 내 친구는 말했다.

"지금 상황에 맞춰 살아야지. 지금의 나도 나잖아."

나는 윌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지금 상황에 맞춰 그냥 살아야지-라는 건 생존에 대한 얘기이다. 살아남는 법에 대한 건데, 윌이 말하는 건 그냥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윌은 '나로 살 수 없는 삶'을 거부한 거다. 그냥 살아가는 것은, 그에게 의미가- 가치가 없었던 거다. 겉으로 살아있지만 내면이 없는 삶을 그는 거부한 것이다.


그 영화를 보던 때에는 프랑스에서의 경험이라던가, 별다른 생각이 없던 때였지만 - 나는 언제나 '왜 살아야 하지?', '살아있다고 다 의미 있는 삶 이가?'라는 생각을 언제나 했다. 나는 가치 있는 삶에 대해 꾸준히 생각해 왔다. 그렇기에, 내게 윌의 마음이 다가왔던 것 같다. 영화 속 윌을 보며, '맞아, 그냥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내가 나답게, 나로 살아가는 게 중요한 거야.'라고 마치 내게 깨달음을 준 것 같았다.


윌이나 박진영을 생각하며, 나로 살 수 없을 때 깊은 절망에 대한 두려움이란 것은 어쩌면 스스로 '이게 나다'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지닌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두려움이 아닐까 싶었다.


언제나 확고한 정체성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그게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될 거라고. 그래서 나도 나를 알고자 했었다. 그러다 문득, 이들의 두려움이나- 프랑스에서 경험 속에서 내가 느끼게 된 우울과 불안을 생각하니- 고정된 나라는 확고한 정체성이 오히려 삶의 위기 속에 우리를 나약하게 만든 게 아닌가 싶었다.


고정된 나라는 정체성은 삶의 위기나 상실 속에서 '나'가 쉽게 무너질 것 같았다.

- "가수"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중요시 여긴다면, 노래를 하지 못하고 무대를 하지 못하면. 내가 나의 삶을 살지 못하는 거다.

- 모험을 즐기며 세상을 활보하며 돌아다니던 윌은, 움직이지 못하게 된 자신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이 아니라 느꼈다.

- 연구원이라는 정체성을 중요하게 여긴 나는, 연구가 잘 되지 않자 이를 모두 나 자신의 실패로, 내 삶의 실패로 느꼈다.


그런데 연구원으로써 연구가 잘 되지 않던 시기에 내 삶 자체가 정말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건 내가 실험실에서 하는 연구라는 좁은 틀 안에 나의 정체성을 가뒀기 때문일 것 같았다. 만약 내가 '탐구하는 인간, 창의적으로 세상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나 자신의 확장하여 생각했다면, 어떤 순간에도 나는 나일 수 있었다.


자유롭게 세상을 활보하는 자신을 진짜 나라고 생각했던 영화 속의 윌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을 '움직이는 나'에게만 자신의 존재를, 좁은 사고에 가둬둔 거다. 오히려 한정된 세상에서의 자신의 존재만을 생각했던 거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혹시 당신이 이 글을 쓰는 나처럼-고정된 사고로 자신을 좁은 틀 안에 가둬두고 정의하고 있진 않은지.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조금 확장시켜 보자. 그렇다면 세상에서 마주칠 상실이나 삶의 위기 속에서 우리는 보다 더 강인하게 나를 지켜나갈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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