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가 계속되는 요즘, 내렸던 눈이 미처 모두 녹지 못해 세상이 살짝 새하얗게 덮여있던 주말- 서점에서 [설국]을 샀다. 눈부시게 하얀 설경 속에서 사랑의 기록이라고 하더라. 서점에서 책을 펼쳐 들고 첫 페이지를 넘기는데 새하얀 설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며 재빠르고 소설 속 풍경으로 끌고 가더라.
생각해 보니, 나는 이런 이미지로 그려지는 소설들을 좋아했다. 얼마 전 다시 읽었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어나가며, 소설 속의 장례식, 해안가에서의 뜨거운 햇볕과 같은 책 속의 텍스트는 이미지로 내 머릿속에 기억됐다. 좋아했던 책들을 생각하면, 선명한 감각, 색채와 빛의 대비와 같이 단순한 줄거리만이 아니라 그 공간의 온도, 빛, 인물의 표정이 정교하게 묘사된 책들을 좋아하더라. 그래서 언젠가부터 순수문학들을 탐닉하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작년쯤이었나, 한 소설을 읽던 중이었다. 전날 밤 너무 늦게까지 책을 읽다 잠들었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어서는 나는 한참을 넷플릭스에 머물렀다. 분명히 어제 보다가 말았던 작품이 있었는데, 내 계정에 보다 만 것이 안 떠있어서 오류인가 싶어 한참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나 어제 책 읽었지'
책장을 살피면서도 딱히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종종 그런 순간들이 있었으니까. 나의 대부분은 기억은 이미지로 기억되니까, 남들도 그러겠거니 했다.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다가 좋아하는 책에 대해 말하며, 묘사가 세세한 것들을 좋아한다며 앞서 말한 경험을 얘기하니 내게 이렇게 말하더라.
"이미지화를 굉장히 잘하시나 봐요. 전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요."
책에 몰입해서 읽다가 잠들면 종종, 꿈속에서 책의 후반부를 내 머릿속에서 나만의 영화로 만들어 재생되기도 한다. 꿈속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제작되는 셈이랄까. 그런 작품들은 모두, 강렬한 이미지의 파편들로 이루어진 작품들이다. 추상적인 단어보다는, 작가가 표현한 묘사들이 머릿속에서 이미지화되면서- 나의 뇌에 책 속의 장면이 구체화된 그런 작품들 말이다.
일상 속에서의 기억에 대해 살펴보면, 난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두 번째 만나도, 처음 보는 사람인 줄 알고 인사를 하기도 한다. 글쓰기 모임을 운영하고 있어서, 오프라인 정모에서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누다 이런 실수를 종종 했다. 그러다 몇 마디를 나누면, 얼굴은 여전히 낯설지만- 처음 만났던 날 그 사람이 앉아있던 자리와 그 사람이 썼던 작품은 떠오른다. 내게 있어 사람은 얼굴로 기억되기보다, 어떤 사람 인가로 기억되는 듯하다. 얼굴로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름 또한 잘 기억하지 못한다. 소설 속에서 추상적인 나열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조금은 통하는 맥락이 아닌가 싶다. 얼굴이나 이름보다, 그 사람이 자리 잡고 있던 공간의 느낌과 그 사람이 하던 말이나 표현들이 내게는 더 기억된다.
나에게는 이미지를 통한 기억이 당연하다. 그게 나의 기본이니까. 그러다 놀랐던 것이 전체 인구의 약 2-3%는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릴 수 없다더라. 아판타시아 (Aphantasia)라는 이들은 눈을 감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이 고작 2-3%내외이니, 나와 다른 이들보다는 나와 비슷한 이들이 아마 이 세상엔 더 많다는 것일게다.
나의 기억 속에서 각 기억의 이름표는 떨어져 나갈 수 있다. 또 누군가의 이름을 남들보다 늦게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어쩌면 꽤나 선명하게 그 사람을 이미지로 간직하고 있다. 그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과 함께, 그 사람의 존재를 기억한다. 이것이 내가 세상을, 그리고 문학을 느끼고 기억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눈이 남아 있는 서점에서 [설국]을 꺼내들었던 나 자신과
책 첫 페이지에서 단숨에 펼쳐진 설경과,
역에 멈춰 선 기차의 장면이 하나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