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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Apr 24. 2024

Amazing Grace

거짓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진짜로, 내가? 정이랑 지아는 어찌 됐냐고 물었다. 나 걔네보다 공부 잘하는데. 대학도 아니고 고등학교를. 이런 일도 있다는 걸  어디서 어렴풋이 듣긴 했지만 실제 본 적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 동네 최초인 가? 창피해 밖에 나갈 수가 없다. 학교도 안 가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두 밤을 그러고 있었다. 지치고 배가 고프다. 초코파이 하나를 까먹으려는데  전화가 왔다. 담임이다. 어디 구석에 있는 여상에 원서를 냈단다. 울며 다시  이불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와 이불을 확 걷는다. 된장국에 만 밥을 입에 억지 로 떠 넣었다. 내가 먹겠다고 밥그릇과 수저를 받아 들었다. 할머니는 귤을 깐 다. 다 먹고 피아노로 가 앉았다. 악보를 폈다. 찬송가 405장.



 엄마가 돈 벌러 서울로 가고 몇 달 지나지 않아 피아노를 보내왔다. 열두 살  겨울이다. 이 거대한 악기가 어떻게 저 작은 문을 지나 쪼끄만 방에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 아저씨 두 명이 묘기를 부리듯 집어넣었다. 신기하다. 먹 을 쌀도 부족한 집구석에 피아노라니. 할머닌 엄마한테 '정신 나간 년'이라고  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내게 무슨 음악에 소질이 있다거나 갖고 싶다고 조 른 일도 없다. 4학년 여름 방학에 면 소재지에 있는 피아노 학원에 다니긴 했 다. 선생님은 딱 한 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하네."라고 말했다. > 중간쯤 쳤을 때 학원이 문을 닫았다. 도시로 이사 간단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가만히 '도, 레, 미, 파 솔.'을 눌렀다. 소리가 맘에 든다. 선생님이 떠나 면서 준 피아노 책을 폈다. 명곡을 간단하게 편집한 소곡집이다. 천천히 오른 손 음만 쳤다. 재밌네. 아빠도 엄마도 없는 외딴집. 바람이라도 불면 텔레비전 도 안 나왔다. 흙 마당에 글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양말을 잘라 인형 옷 을 만들기도 하고. 심심한 나에게 소리를 내는 친구가 생겼다. 교회에 가면 반 주자 손만 봤다. 이 반주자는 찬송가 405장을 잘 쳤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 이 느껴졌다.



 '부기 학원'이란 델 갔다. 여상에 가면 이런 걸 배운다기에. 자산이 어떻고 부 채가 어떻고 하는 말을 가르쳐 주었다. 뭐야, 이것도 산수인가? 더하고 빼고, 이런 것 질색인데. 학교를 졸업해도 취직할 수 없을 것 같다. 남의 재산 계산 하는 데 인생을 바치기 싫다. 좀 깎아 준다기에 두 달치 학원비를 미리 낸 터 였다. 돈이 아까워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다녔다. 흥미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나는 남의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원장님을 찾아갔다. 그만 다니고 싶다고, 환불해 달라고 말했다. 나를 빤히 쳐 다본다. 나도 눈을 떼지 않고 선생님을 봤다. "꿈이라도 있는 거니?" 으레 써 내는 장래희망 칸을 채우려 무언가 적긴 했지. 교사, 기자, 승무원 이런 것. " 피아니스트요." 어디까지 쳤냐고 묻는다. "체르니 30번이요." 책상 서랍에서 8 만 원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피아니스트라. 하하. 너무 웃겼다. 그런 생각 해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깜찍한 말이 나왔는지. 오른손 음을 완벽하게 칠 수 있게 됐을 때 찬송가 뒷면 에 나온 코드표를 보며 왼손 화음을 연습했다. 나는 그냥 그 반주자처럼  노래를 잘 연주하고 싶었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배워 거짓 말한 걸 만회해 볼까? 8만 원을 들고 피아노 학원을 찾았다. "전공하긴 늦었겠 죠?" 넌지시 물었다. 내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다. 부기 학원 원장님과 같은 말 이다. 어디까지 배웠냐고. ">이요." 손가락이 나무젓가락처럼 길고  하얀 선생님이 웃는다. 나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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