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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Oct 22. 2024

나란 여자

상처


세어보니 아주 골고루다. 아빠, 엄마, 고모, 이모, 삼촌, 친구, 남편, 할머니, 할아버지. 받은 상처를 다 잊었다 하면  그렇고 샘샘이라고 할까. 일방적인 관계는 없으니 말이다. 모두에게 적당히 되갚았다. 앞에서 웃고 뒤돌아 씹거나 대놓고 무시했다. 아주 아프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건 정말 양심적이고 공정한 방식 같다. 더했으면 더했지 그대로 돌려주는 건 어렵다. 복수하지 못했어도 더는 얼굴 안 봐도 되는 사이는 그걸로 충분하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테스트기를 사용해 보기 전에 확신했다. 냉장고 문을 여는데 구역질이 나 화장실로 달렸다. 하마터면 배 속에 든 걸 냉장고에 쏟을 뻔했다. 그래도 절차를 따라 약국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샀다. 아침 첫 소변으로 하는 게 정확하다기에 그렇게 했다. 오줌을 묻혀 평평한 곳에 두었다. 진한 선이 먼저 생기고 희미한 선이 뒤따랐다. 엊그제 큰애 돌잔치를 마쳤다. 100년 같던 1년, 격동의 시간.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아 길고 하루도 평범한 날이 없어 순식간이었다. 이런 희로애락은 처음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숨이 끊어질 것 같지는 않았고 세상이 다 내 것처럼 좋은 일도 없었으니까.  아이는 심한 아토피였다. 성한 데라곤  손바닥, 발바닥뿐이고 온 데가 다 짓무르고 긁다 못해 쥐어뜯어 놓아 피가 났다. 사람들은 우리더러 떠나라고 했다. 아주아주 깨끗한, 산이든지 바다든지 이 나라에 마땅한 데가 없으면 호주나 캐나다 같은 곳으로. 심각하게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아이 피부가 점점 좋아졌다. 돌잔치는 생각도 못 했는데 늦게나마 치르고, 살던 곳에 계속 있어도 되어서 좋다. 그래서 임신도 되었나 보다. 희미했던 선이 두어 시간 지나니 진해졌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병원으로 갔다. 아직 아이를 한 번밖에 낳아보지 않았는데 모든 일이  익숙하다. 구역질, 산부인과, 임신테스트기. 세상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임신이 맞다며  2주 있다가 오라고 한다. 그렇구나, 또 애를 낳아야 하는구나. 어른들께 소식을 알렸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낳아서 얼른 키우는 게 좋은 거라며 전화를 끊으셨다. 어른들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그럼 그 좋은 날은 언제일까, 2024년쯤? 아들은 이제야 밤에 긁지 않고 잠을 자고 새살이 돋고 포동포동 살이 올라 귀여운데. 나중보다 지금, 지금 이 순간의 편안이 길면 좋겠다. 
 
 


오라는 날에 맞춰 병원에 갔다. 6주쯤 되었다고 한다. 심장 소리를 들려준다. 아기집에 점처럼 작은 것이 보일락 말락 하던데 그 안에 심장 있다니. 이런 건 두 번째여도 신기하다. 또 내원 날짜를 잡아 주었다. 참 자주 오라고 한다. 여자들이 병원에서 안전하게 애 낳는 일이 얼마나 되었을까? 88년생인 내 동생도 집에서 태어났는데. 정해 준 날에 병원엘 가지 않았다. 이래저래 바쁘고 아들이 아팠다. 한 달 만에 의사를 만났다. 능숙하게 누워 티셔츠를 올리고 바지를 살짝 내렸다. 간호사가 배에 차갑고 끈적한 초음파젤을 잔뜩 바르고는 준비 다 되었다며 원장님을 불렀다. 원장이 와서 기계를 아랫배에 밀착시켜 구석구석 문지르며 모니터를 빤히 쳐다보더니 "애기 심장이 안 뛰네요."라고 말했다. 하던 걸 멈추곤 일어난다. 간호사가 황급히 배에 묻어 있는 걸 두꺼운 휴지로 닦고 옷을 입으라고 한다. 진료실 의자에 앉았다. "유산이에요." 유산? 아, 죽은 거. 의사 입에서 그 단어가 뱉어져 나온 지 1초도 안 되는 시간, 0.5초나 0.1초쯤에 나는 내년 8월에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는 기쁨을 먼저 느꼈다. 불쾌한 희열 같은 거였다. 이내 스스로가 거북스러워 토하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밖에서 나머지 일을 알려 줄 거라며 가 보라는 눈짓을 한다. 그렇잖아도 빨리 나가고 싶다. 일어나 문고리를 잡는데 의사가 "애기 엄마, 너무 자책 마요. 이 아이랑 인연이 아니었던 거예요."라고 한다. '선생님, 무슨 말씀을요. 그런 사람 아닙니다.'라고 말하지 못했다. 간호사는 자궁에 있는 걸 '긁어내야 한다'라고 표현했다. 오늘은 할 수 없으니 내일 오라고 한다.
 


 
죽은 사람을 배에 담고 집에 왔다. 어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애는 또 생기는 법이니 밥 잘 먹고 잠 잘 자라고 하신다. 알았다고 전화를 끊고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가서 긁어냈다. 장례도 무덤도 필요 없는 깔끔한 죽음이다. 어른들 예견대로 몇 년 지나 애는 또 생기고 또 생기고 또, 생겼다. 사랑은 끝없이 샘솟아 여러 아이를 보듬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준 사랑보다 더 크게 돌려받았다. 그렇게 이전에 예서 제서 받은 상처는 잊히고 아물었다. 모든 게 희미해지는데 그날 진료실에서 느꼈던 거북한 기쁨은 뼈에 남았는지 불쑥불쑥 일어나 가만있는 나를 난도질한다. '엄마, 사랑해.'라는 말을 듣거나 누가 '선영 씨, 고마워요."라고 하면 나라는 인간을 확인시키고픈 충동이 인다. 내가 나에게 준 상처. 이건 어떻게 되갚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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