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BD, 2월 1주
*주간 에세이를 쓰겠다는 다짐이 작심 일주일 만에 월간 에세이가 되었습니다. 선포한 다짐이 부끄럽지만 그래도 월간이 격주간 되고 격주간이 주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낙천적인 바람을 갖고 염치없지만 이 불규칙한 업로더를 너그러이 봐주세요 : )
얼마 전 자주 방문하지 않는 장소에서 모르는 사람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S형, 안녕하세요,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나는 아주 조금 놀라면서도 심드렁하지만 예의 바르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전 S의 쌍둥이 형인데요, 혹시 어떻게 아시나요?'
'아, 쌍둥이 형이세요? 죄송해요. 너무 똑같이 생기셔서 S형인 줄 알았어요. S형 잘 지내죠?'
'네, 잘 지내요. 누구라고 전해줄까요?'
'아 네, 저는 S형 대학 후배에요.'
'네, 만났다고 전해줄게요. 살펴 가세요~'
MSG살짝 쳐서,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길을 가다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하거나, 먼발치에서 반갑다는 듯 인사를 한다. 살아온 날이 이제 삼십 년 조금 넘었으니 기억 못 할 정도로 아는 사람이 많지도 않고, 기억력이 감퇴하기에는 아직 젊(다고 믿)기에 내가 지인을 못 알아본 게 아니라 그들이 나를 쌍둥이 동생이라 착각했다 생각한다. 직접 대면하여 아는 척하면 '나 S아니라고' (내 동생이랑 난 다르게 생겼다고. 자존심 상한다고) 말하면 되는데, 멀리서 인사할 때는 나도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어주거나 목례를 하며 본의 아니게 동생인 척한다. 멀리 뛰어가 '나 걔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사를 씹으면 동생 인간관계에 해가 되니 어쩔 수 없는 도리다.
이런 에피소드를 지인들에게 이야기하면 다들 신기하고 놀라워한다. 그럴 만도 한 게, 일란성쌍둥이 비율이 전체 인구 대비 0.3% 수준이라고 하니(나라별로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주위에 쌍둥이도 별로 없는데, (물론 최근 우리나라에서 쌍둥이 출생률이 올라가긴 했지만) 쌍둥이 에피소드는 쉽게 듣지 못할 만도 하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쌍둥이로 태어나, 쌍둥이가 아닌 non쌍둥이?로 살아본 적이 없는 내게, 쌍둥이의 정체성이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non쌍둥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일에 일장일단이 있듯이 쌍둥이로 사는 것에도 장단점이 있다. 하지만 단점이 1이라면 장점은 10 정도. 쌍둥이로 사는 것의 장점은 생물학적, 존재론적, 사회적, 유희적인 측면에서 조으다. (물론, 이건 쌍둥이 당사자들에게 해당. 쌍둥이를 키워야 하는 부모나 쌍둥이를 형제로 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수 있다)
인간복제를 다룬 <아일랜드> 같은 영화를 볼 때 자연스럽게 '나랑 같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같은 상상을 하곤 하는데, 쌍둥이들은 이미 (물론 복제인간은 아니지만) 세미 복제인간이랑 살고 있다. 사실 일란성쌍둥이는 본래 하나의 수정체가 두 개의 배아로 나눠진 생명체이기 때문에 조금 과장 보태서 세미 복제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생긴 건 말할 것도 없고, 취향, 취미, 기호, 목소리, 말투 등이 유사한 인간과 비슷한 환경과 비슷한 인간관계 속에서 산다는 건 특별한 경험이다. 어렸을 적엔 내가 감기 들면 며칠 후에 동생이 따라서 감기에 들고(바이러스니 당연하지만...), 놀랍게도 내가 왼쪽 무릎에 상처를 내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쌍둥이 동생 왼쪽 무릎에 상처가 난다.(이건 좀 신기) 같은 부모 밑에서 같은 음식 먹고, 같은 음악 듣고, 같은 영화와 TV프로그램을 보다 보니 취향도 취미도 심지어 감탄사를 내뱉는 타이밍도 비슷하다. 심지어 때론 서로 짠 듯이 갑자기 뜬금없는 음악의 멜로디를 동시에 흥얼거리다 '갑분찌'(갑자기 분위기 찌찌뽕)가 되기도 한다.
먼 미래에 과학이 발달하고 사회적으로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합의/해결되어 복제인간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온다면 가장 빨리 적응할 사람들은 당연 일란성 쌍둥이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쌍둥이들은 미래형 인간이자 진화형? 인간종인듯싶다.
쌍둥이로 산다는 것의 존재론적 장점은 서로가 인간 거울이 되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과 성찰하는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데 있다. 간혹 집 밖에서 동생을 볼 때 나는 겸손해진다. '내가 저렇게 생겼었나. 어쩌다 저렇게 생겼지. 난 저렇게 생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항상 겸손하게 살아야겠구나'. 이것은 마치 과거 내 사진을 볼 때 느끼는 '아 내가 저렇게 생겼었다니. 내가 저렇게 촌스런 빅뱅 머플러를 하고 다녔다니! 내가 고자 찐따라니' 같은 찐따미 앞에 숙연해지는 겸손과 엄숙함과 같다. 아무리 내가 동생보다 외모가 낫다고 스스로 생각한들, 주위에서 '니가 좀 더 낫다'고 아무리 나를 위로한들, 그건 결국 하늘 향해 침 뱉기다. 일란성 쌍둥이가 더 잘생기면 얼마나 더 잘생겼고, 못쉥겼으면 얼마나 더 못쉥겼겠냐. 하지만 더 슬픈 건 10명 중 9명이 둘이 똑같다고 해도 단 한 명이 내가 더 잘생겼다고 했을 때 느껴지는 미적, 존재론적 우월감을 마주했을 때다. 거의, almost, 똑같이 생긴 생명체 앞에서도 어떻게든 내가 좀 더 나아지고 싶은,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존재가 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때의 그 부끄러움은 일란성 쌍둥이가 아니라면 알 수 없다.
세미 복제인간의 경험과 성찰하는 사피엔스로 살아가는 장점 외에 쌍둥이로서 사는 삶의 또 다른 장점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의 기회들이다. 학창 시절부터 동생과 나는 맞벌이 부부가 각자 번 월급을 한 통장에 모아 돈을 더 빨리 모으듯이 각자 반에서 친해진 친구들을 모아? 만났다. 자연스럽게 친구가 두 배가 되고 어려서부터 다양한 사회적 관계의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라이 질량의 법칙에 따르면 어디든 또라이의 수가 정해져 있다는데 나는 내 관계의 또라이 1과 쌍둥이 동생 관계의 또라이 1이 합쳐서 2라는 두 배의 또라이 관계 경험을 쌓게 된다. 이것은 자연스레 사회성을 함양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물론 반대로 좋은 친구의 수도 두 배가 된다.
마지막은 장점이자 단점인데, 바로 심심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것.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 항상 옆에 있으니 딱히 심심할 일이 없다. 친구가 필요한 날에 고개만 돌리면 나랑 비슷하게 생긴 애가 5분 대기조마냥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다 보니 정작 혼자여야 할 때 찾아오는 고독과 시간의 진공에 적응을 잘 못한다. 고등학교 때까지 동생과 같은 학교를 다니다 각자 대학교에 가서야 처음으로 나만의 인간관계를 맺기 시작했을 때, 스무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공강 시간에 점심 약속을 잡아야 했을 때의 당황스러움도 쌍둥이만 경험할 수 있는 늦은 당혹감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이것도 금방 적응되지만, 상대적으로 쌍둥이들은 독립심과 독립성이 늦게 완성된다.
나이가 더 들어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쌍둥이의 단점이 장점보다 많아질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장점이 훨씬 많다. 어느덧 아이의 부모가 될 나이가 되어 쌍둥이 부모들인(혹은 쌍둥이를 임신한) 친구들이 쌍둥이의 장점을 물어본다.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쌍둥이는 항상 옳다
유니크한 생물학적 체험, 언제나 겸손케 되는 존재론적 성숙함의 경험, 친구가 두 배가 되는 관계의 풍성함, 심심할 일 없는 디폴트 친구의 존재. 쌍둥이가 되는 것과 쌍둥이를 낳는 것에 인간의 의지는 1도 없기에 그런 점에서 인구의 0.3%라는 쌍둥이의 경험을 선물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다. 내 인생에 무슨 타이틀이든 언제 0.3% 해보겠는가. 본인이 쌍둥이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쌍둥이를 낳고 싶다면 지금부터 기도하라. 0.3%의 선물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