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균 교수의 <가끔은 제정신>을 읽고
착각은 섞일 착과 깨달을 각이 합쳐진 단어로, 영어로는 mistake, cofuse, misunderstand라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착각의 뜻을 어떤 사물과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지각하거나 의식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착각은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착각을 한다. 세계가 거대한 착각의 늪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착각은 왜 하는 걸까. 모든 생명체들이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존재들이 서로 협력해야만, 완전하고 확실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역설이다. 허태균 교수의 <가끔은 제정신>은 지금껏 진실이라고 믿었지만 사실 착각이었던 사건들을 나열한다. 이 과정을 통해 다양한 착각 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비난 아닌 이해의 관점으로 안내한다.
예전에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과 상대한 적이 있었다. 욕이 절로 나오고 인간관계의 염증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이 오해로 인한 상황이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했던 말들을 주워 담기 바빴다. 당황한 나머지 시치미를 떼기도 했다. 정의를 추구한다면서 정작 그 반대의 행동을 한 셈이다.
상대방의 진의를 알 수 없는 불완전한 우리에게 착각은 인간관계의 오해와 갈등을 낳는 씨앗이다. 그래서일까. 착각은 자유라는 말은 이제는 더 이상 용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이유다. 심지어 스스로 깨달은 착각에도 결코 관대하지 않다. 사실 착각은 상대방의 입장보다 자기주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녕 착각하지 않을 수 없을까.
요즘에는 학원, PC방, 카페 등 다양한 장소들로 하여금 아이들이 밖에서 노는 것을 보기 어려워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놀이터에 아이들이 항상 붐볐다. 어른이 된 지금의 시선에서도 놀이터에 있는 놀이기구는 여전히 신기하다. 그중에서도 시소는 놀이터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놀이기구다.
예전에 놀이터에는 시소를 유난히 잘 타는 아이들이 한 명씩 있었다. 필요에 따라 상대방에게 힘을 주고, 반대로 상대방에게 힘을 양보하면서 최대한 오랫동안 공중에 떠있었다. 이것이 바로 착각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다. 자신의 주장에 힘을 주는 것은 물론, 상대방의 입장도 적절히 고려해야 오해와 갈등 없이 인간관계를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착각했다고 인정해야 할까. 착각했다고 인정하는 그 자체가 중립적인 사고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실에 대해 착각하고 있지 않은지 고민한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이해의 여유가 생긴다. 한쪽에만 치우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닌, 다른 쪽도 생각함으로써 좀 더 다양한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시소를 잘 타는 아이와 같은 것이다.
착각은 정확한 지각의 중요성을 배우는 기회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다이애나 도이치 교수
만약 당신이 여전히 착각 속에 빠져서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착각은 인정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착각이 아니다. 오히려 깨달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착각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인정해야 한다.
이 과정을 거쳐야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에 귀 기울일 수 있다.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더라도 넓은 아량과 다양한 사고로 이해하려고 시도해봐야 한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분쟁과 상처 없는 세상에 도달하지 않을까. 아니면 이것 또한 착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