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 작가의 <루디>를 읽고
위대한 영화감독 중 한 명을 뽑는다면 박찬욱 감독을 뽑고 싶다. 그는 자타공인 대한민국에서 복수를 가장 맛있게 그리는 사람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 씨>, <복수는 나의 것> 등 그의 대표작에는 복수하는 자와 복수하려는 대상이 복수로 존재한다. 그의 영화의 주인공은 지옥과 같은 삶 속에서 복수귀가 되어 처절하게 복수한다.
박민규 작가의 <루디>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을 괴한으로 만든 세상에 복수하는 루디와 그런 루디에게 처절하게 맞서는 주인공, 그리고 그 과정에서 루디처럼 괴물로 변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연상하게 만든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괴물이 살고 있다. 다만 엄격한 통제로 잠시 감금되어 있을 뿐, 그는 늘 자신을 세상 밖으로 꺼내주기를 고대한다. 그렇다고 이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 없다. 누군가는 법의 심판을 받는 괴한이 되겠지만, 이것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예술가는 대중에게 인정받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상상이나 대화, 행동을 통해 조금씩 표출하면서 살아간다.
루디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은 물론, 자신이 받는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루디가 갓난아기였을 때, 한 괴한이 그의 주변사람들을 모두 살해했다. 사람들은 괴한으로부터 살아남은 루디를 향해 신의 아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축복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것은 희망이지만 모두가 죽고 홀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오히려 절망에 가까웠다. 루디는 결국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괴로워했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다. 그래서 루디는 복수귀가 되기로, 또 자신과 같은 한 명의 괴물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반면, 주인공은 평범한 사람이다. 뉴욕의 작은 금융회사의 부사장으로, 좋은 대학을 나왔고, 기부도 자주 하고, 세금도 잘 낸다. 확실히 복수귀인 루디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나 루디를 만나고 평범한 그의 일상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위기가 거듭될수록 주인공에게도 변화가 찾아온다. 자신도 모르게 품고 있었던 악마가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주인공은 루디를 피해 도망갈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복수를 위해 달아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것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니었다.
와신상담이라는 유명한 사자성어가 있다. 복수를 위해 땔감에서 자고, 웅담을 맛보며 매일 마음을 다잡는다는 말로, 마음먹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온갖 괴로움을 견뎌야 한다는 뜻이다. 주인공은 와신상담한다는 심정으로 괴로움을 견뎌냈고, 바라던 대로 결국 루디에게 복수했다.
망각보다 강한 복수는 없다
스페인 철학자, 발타사르 그라시안
모든 것이 끝나고 주인공의 마음은 어땠을까. 정말 후련했을까. 예상컨대 주인공은 아마도 예전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할 것이다. 루디처럼 잔혹한 복수귀는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오랜 시간 동안 트라우마로 고통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괴한이었던 루디에게 어떻게 복수해야 했을까.
박민규 작가의 <루디>에서는 러닝메이트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마라톤과 같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것이 목표든, 행복이든 우리는 모두 같은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마다 시작점과 달리는 속도가 각각 다른 것 같다. 불공정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루디처럼 복수귀가 된다.
하지만 부유하든, 가난하든 우리의 결승선은 모두 같다. 우리 사회는 1등 주자에게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주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완주라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마라톤은 1등보다 완주가 더 중요하다. 또한 완주는 오랫동안 함께 달릴 수 있는 사람, 결국 러닝메이트가 필요하다.
만약 1등이 아닌 완주를 목표로 천천히 달린다면 어떨까. 아마도 조금은 여유롭게 주변을 바라보며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함께 뛰는 사람들을 조금 더 배려하고 교류한다면, 더 많은 러닝메이트들과 외롭지 않게 오랫동안 달릴 수 있다. 그러나 낙오의 공포가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앞선 사람들을 제치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쩌면 복수귀 루디는 이러한 낙오의 공포를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만큼 외로운 삶을 살았으니까. 나보다 빠른 주자의 다리에 총을 쏘고 싶은 그 마음. 그렇다면 우리 안의 괴한은 누가 만들었을까. 마라톤과 같은 세상인가. 아니면 스스로 만든 두려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