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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제 샀을까, 식기세척기

작은 사치, 큰 행복

by 황여울


반백 년 만에 드디어 신문물의 맛을 보았다. 바로 식기세척기다.


집수리를 하며 오래된 가전들을 정리했다. 10년 넘게 쓴 것들이라 하나둘 무료로 나눔을 하거나 떠나보내야 했다. 아쉽기보다는 오히려 홀가분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취향을 담은 가전을 선택할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네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봐.”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늘 가성비만을 기준 삼던 내가 이번에는 처음으로 내 마음을 따라 욕심을 내 보았다.


싱가포르의 대형 가전 매장을 몇 번이고 돌며 직원의 설명을 듣고 가격도 꼼꼼히 비교했다. 유튜브 리뷰를 참고해 메모한 모델을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한국 제품은 선택의 폭이 좁고 가격도 두세 배나 비쌌지만, 결국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한국산이었다. 냉장고와 세탁기는 그렇게 장만했고, 그리고 마침내 우리 집에는 들어올 것 같지 않았던 식기세척기까지 들이게 되었다.


20250507_143812.jpg 발품 팔며 비교했던 싱가포르 가전 매장


이사 후 가장 먼저 한 건 부엌 정리였다. 그릇과 주방 도구들을 미리 생각해 둔 자리에 넣었다. 식기세척기는 첫 사용 전에 예비세탁 버튼을 눌러 내부를 세척했다. 평소 잘 쓰는 그릇과 수저를 차곡차곡 넣으니 생각보다 많이 들어갔다. 세제통에 고체형 세제를 넣고 자동세척 버튼을 눌렀다.


곧 잔잔한 기계음이 들렸다. 작동이 시작된 것이다.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조작부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 식기세척기를 본 건 오래전 미국에서였다. 월세 아파트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관리가 안 된 탓에 하수구 냄새만 가득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후 한국에 잠시 들렀을 때 지인의 집에서도 보았다. 간단한 저녁 식사였는데도 설거지거리가 꽤 많았다. 얼른 일어나 그릇을 씻으려 하자, 설거지할 필요가 없다며 나를 말렸다. 큰 음식물만 털어내고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차곡차곡 넣으니, 그 많은 그릇들이 모두 들어갔다. 버튼을 누르자 부드러운 작동 소리가 났다. 어느 누구의 설거지 노동 없이 함께 앉아 과일을 먹었다. 그날 본 하얀 밀레 식기세척기는 내게 '꿈의 기계'가 되었다.


싱가포르에서 살면서도 식기세척기를 사고 싶었지만, 싱크대 하부장 구조가 맞지 않아 살 수 없었다. 부엌이 좁아 독립형을 둘 공간도 없었다. 결국 ‘설거지야 금방 하는데 그냥 내가 하지 뭐’라는 생각으로 20년을 보냈다. 하지만 정말 설거지거리가 많고 피곤한 날이면 ‘식기세척기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번 집수리 때는 꼭 식기세척기를 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브랜드도 이미 정해 두었다. 오래전 내 눈을 사로잡았던 밀레였다. 싱가포르 가전 매장에는 밀레 제품이 딱 두 종류밖에 없었다. 신형은 자동 문열림과 자동 세제 공급 등 기능이 좋았지만 가격이 비쌌고 전용 세제를 써야 했다. 고민 끝에 이전 모델을 선택했다. 문은 내가 열면 되고, 일반 세제를 쓰는 게 나에겐 더 편리할 것 같았다.


식기세척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부엌 바닥에 앉아 있자, 왠지 울컥했다. 25년 전 그 식기세척기를 이제야 써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뒤, 세척 종료 버튼이 켜졌다. 문을 여니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왔다. 그릇은 삶은 듯 뜨끈했고 건조도 잘 되어 있었다. 뽀득뽀득한 느낌이 참 좋았다. 내친김에 나머지 그릇도 두 번에 나눠 돌려 모두 찬장에 넣었다.


20250921_133451.jpg 세척 후 뽀득뽀득해진 그릇들, 작은 행복


이렇게 바쁜 날, 설거지를 대신해 주니 얼마나 편리한지! 혼자 설거지했다면 한참 걸렸을 텐데 금세 끝났다. 지난 15년 학교에서 일할 때 식기세척기만 있었어도 삶의 질이 달라졌을 것 같다. 출근 전 식사 준비하고 다녀와서 부엌 정리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잠시 불편을 감수하고 싱크대 공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뒤늦게 밀려왔다.


처음에는 식기세척기를 쓰면 물과 전기를 낭비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히려 절약된다고 한다.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물 사용량은 손설거지보다 5분의 1에 불과하고, 최신 기종은 전기 소모도 적다고 한다.


이제는 하루 종일 그릇이 많이 쌓이는 날, 특히 저녁에 한식으로 차릴 때 식기세척기가 큰 힘이 된다. 간단한 건 손으로 하지만, 그릇이 꽉 찬 날엔 세제를 넣고 돌린다. 함께 먹고 함께 치울 수 있으니 여간 편리한 게 아니다.


식기세척기를 바라보고 있으니 아들이 물었다.

“엄마, 식기세척기가 그렇게 좋아요?”

“응, 나 이거 진짜 갖고 싶었거든. 너 결혼할 때 엄마가 하나 사 줄게. 두 사람 다 편하게 정리하고 쉬면 좋잖아”

아들은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 그런데 저 아직 결혼은 멀었어요 ㅎㅎ"

그 말에 나도 웃음이 났다.


내 방 책상에 앉아 고개를 돌리면 식기세척기가 보인다. 모던한 부엌 인테리어 속에 다소 올드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다른 가전은 모두 최신형으로 들였지만, 식기세척기만큼은 달랐다. 아마도 오래전 그날, 내 눈에 너무 빛나 보였던 그 기계가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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