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무명 아나운서의 업무일지

안녕하세요 하찮고 짜치는 어느 아나운서입니다. 그렇게 어리지도 않아요.

by 아나부랭이

나는 어떤 잘 알려지지 않은 경제 방송국을 다니는 아나운서다.

경제아나운서는 대본을 직접 본인이 다 쓴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모든 경제 아나운서는 그럴 것이다.


아침 8~9시 출근해서

메이크업을 받기전 바짝 시장을 보고. 내용을 정리하고. 대본을 쓰고. 자막까지 쓴다.


그리곤 10시, 준비된 의상을 입고 헤어를 받는다.

메이크업은 내가 한다.

처음에는 이전에 계셨던 쌤들이 해주는 메이크업이 내게 너무 안맞아서

메이크업마저 직접 내가 해야한다는게 좀 버거웠는데

이제는 화면에 잘나오는 내얼굴에 맞는 화장법을 내가 터득하기도 했고

내 손이 제일 빠르다. 더불어서 헤어받을때 헤어가 흔들릴때도 아랑곳안하고 동시에 메이크업을 빠르게 할 수 있는건 내 손뿐이라. 아무튼 메이크업은 매번 내가 직접 한다.

다행인건 지금 헤어쌤은 헤어를 정말 잘 해주신다. 헤어는 방송외모에 정말 생명이다.

이전쌤은 헤어를 너무 너무 못해서 정말 울고싶었다.

거지같은 헤어로 방송나올때마다 원망스러워서 미치는 줄 알았다.

사실은 아무머리나 어울리지않은 내 얼굴이 원망스러운것도 있긴하다.


11시, 첫방송.

11시 반에 다시 들어간다. 두번째 투입.


12시, 잠시 밥을 먹으러 간다.

다음 방송 대본을 써야하기때문에 시간이 많지는않다.

회사 지하에 있는 분식집에서 10분만에 때우고 올라온다.

커피도 사온다. 어쩌면 하루중 제일 좋은 시간!


12시 20분, 다시 대본을 쓴다. 시장이 바뀐다.

그리고 나는 증권사 리포트를 읽는 코너가 있으니,

오늘 시장의 화두에 맞춰 증권사 리포트를 고르고

피디님과 감독님께 요약 자막을 써서 보낸다.

~1시 40분까지 시장 보면서 다음 방송 준비한다. 그래도 이정도면 널럴한 편


2시, 세번째 방송 투입.

끝나면 2시 반


10분만에 아까 쓰던 리포트 대본 원고를 쓴다.

불가능할 것 같은 영역인데 이게 된다

대신 예독을 못해서 늘... 속상하다..


2시 40분, 네번째로 후다닥 들어간다.

나오면 3시.


3시부터는 잠깐 숨돌릴 틈은 있지만. 다음 방송을 준비해야한다.


문제의 다음방송.

매회마다 패널 및 출연진이 달라지는 프로그램이다.

문제는 그 출연진들이 대부분 방송을 처음 하시는 분들이라 약간의 인솔.. 을 해야한다.

오시면 인솔하고. 안내하고. 리허설까지 진행한다.

하지만 이 시간의 나의 목과 컨디션은 바닥.

리허설할때 목소리 상태는 정말 처참하다 .


4시반 리허설 ~ 5시반 끝

서둘러 나도 방송준비를 좀 한 다음

6시 다섯번째 방송투입

끝나면 7시, 이것이 퇴근.


그리곤 요즘의 나에겐 추가적인 일이 또 있다.


그 문제의 다섯번째 6시 방송의 대본을 취합하는 것.


처음엔 이 일이 나에게 온 것이 정말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작가님들이 해주시는 일인데

다섯번째 방송에는 작가님이 안계셔서 여태까지는 다른 PD님이 하셨다.

근데 이번에 PD님이 바뀌고선

무조건 내가 해야한다면서.


이미 나에겐 여력이 없던 상태라 거부했지만

해야한댄다.

내겐 거부권이없다.

꼬우면 나갈 수 밖에.

내 자리를 원하는 친구들은 너무나 많을테니까.

그 때문에 여기는 절대적인 갑을 시장 구조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렇게 퇴근해서

잠깐 숨을 돌리거나, 밥을먹거나 한 후


방송취합을 위해서 패널들이 주신 자료와 대본을 열어보면

사실 좀 속상하다.


돌려쓰는 대본이 있단다.

그래서 매번 같은내용 같은주제로 온다.

같은 대본을, 다른 출연진들이 토씨하나 안틀리고 갖고오신다.


그분들은 다들 처음 갖고온다고생각하겠지만

나는 그 같은 주제 같은 내용을 15번씩은 다뤘다.

같은 내용을 다루면서 현타가 온다.

우리 방송국을 얕잡아 보신 분들도 계셨다.

나도 그렇게 크거나 유명한 방송국이라고 생각하지않는 우리 회사지만,

그렇게 느껴질땐 기분이 나쁘다.


똑같은 내용인 대본을 취합하고.

위치에 맞게 자료를 넣고 하는일,

난 이미 너무 피곤하고,

혹은 아나운싱을 연습하거나 시장을 공부하고싶은데 그럴 시간도 다 뺏기고

나는 이 일이 하루 중 제일 싫다. 너무나 피로하다 정말.


그렇지만 한다.

그렇게 내 하루는 끝


그냥 한번 기록하고싶어서 쓰는

어떤 하찮은 아나운서의 업무일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