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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잉조랭이 Mar 24. 2020

앤 셜리, 네 수다에 용기 한 스푼을!

루시 모드 몽고메리, '빨강 머리 앤'의  이야기




 앤은 춤추는 듯한 걸음으로 조그만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주근깨 박힌 뾰족한 얼굴과 엄숙한 회색 눈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너는 그냥 그린게이블스의 앤이야." 앤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코딜리어 피츠제럴드를 상상할 때마다 보이는 건 이런 네 모습뿐이야. 하지만 어디에도 갈 데 없는 앤보다는 그린게이블스의 앤이 백만 배는 좋아." (윌북 출판사, 걸 클래식 컬션 '빨강 머리 앤'의 103p 중에서)








윌북 출판사 걸 클래식 컬렉션 '빨강 머리 앤' 표지
가족을 사랑한 루시 모드 몽고메리와 앤 셜리 - 그녀의 희생은 자유이며, 혁명이었다.

 

 10살 무렵 처음 만났었던 소녀, 이름 끝에 'e'가 붙는 앤 셜리는 수다쟁이였다. 상상하는 몽상가이기도 했고, 누구보다 반짝였던 예술가였으며, 동시에 혁명가였다. '빨강 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고등 교육이 최선이었던 여성의 삶을 깨트리고, 사범 대학을 갔고,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만큼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며, 자신이 배운 것을 활용하여 남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기도 하고, 신문 기자가 되어 살기도 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작품 '빨강 머리 앤'은 그녀의 가치관을 잘 녹여내고 있다. 그 예로 자신을 낳은 부모는 아니지만 자신을 길러주고 보듬어줬던 외조모와 외조부를 위해, 교사 생활 중 외조부의 별세에 몽고메리가 곧장 캐번디시로 돌아와 우체국 일을 도맡아 한 것처럼, 작품 속 앤도 장학금을 받았음에도 레드먼드 대학으로 가지 않고 매슈의 부고로 인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에이번리로 돌아와 교사가 되었다. 작가 몽고메리는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명예보다 더 소중한 것이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실천하였으며, 그것을 앤 셜리의 모습으로도 부드럽고 온화하게 표현해내었다.

 하지만 작가는 고작 자신의 작품에 '여성의 희생'은 숭고한 것이니, 반드시 여성에게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라!" 하기 위해서 글을 쓰지 않았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평생 자신의 작품과, 자신의 가족에게 모두 최선을 다해 살았던 작가였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녀는 자신을 비롯한 여성에게 주어져야 하는 올바른 자유를 사랑했고, 배우는 것을 즐겼으며, 수다쟁이 앤 셜리처럼 상상하는 몽상가였고, 매사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만약 그녀가 희생을 강요하기 위한 글을 썼더라면 이름 끝에 'e'가 붙는 '빨강 머리 앤'은 지금쯤 빨간 머리의 소녀의 연애기와 흔히 말하는 해피 엔딩(Happy ending)인 결혼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몽고메리는 말하는 것만 같다. '누군가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 아닌, 누군가의 명예와 부귀영화를 떨쳐낼 수많은 용기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적어도 자유로움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배움과 상상과 수많은 자연의 섭리와, 그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작가라면, 이런 의도로 앤 셜리의 삶을 그려낸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감히 예상해본다.




앤과 마릴라, 실수를 인하여 천천히 만들어지는 존재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웠던, 이름 끝에 'e'가 붙는 앤 셜리는 고아였고, 어쩌다 보니 실수로 마릴라와 매슈가 살고 있는 그린게이블스로 오게 되었다. 외모도 외모였지만, 상대적으로 말이 엄청나게 많은 수다쟁이였던 앤은, 확실히 마릴라와 매슈가 바라던 아이는 아니었다. 만약 내가 두 사람이었다면, 황당한 것을 넘어서서 당혹스럽고, 일손이 필요해서 불렀던 소년이 아닌 깡마른 소녀가 온 것에 대하여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아이에게 설명하는 문제는 내 머릴 아프게 하는 일등 공신이었을 것이다.


'오늘 밤에는 아이에게 여기서 살게 됐다고 말해주지 않을거야.' 마릴라는 우유를 크림 분리기에 넣으며 생각했다. '너무 기뻐서 잠을 못 잘 테니까. 마릴라 커스버트, 이제 완전히 코가 꿰였구나. 네가 고아 소녀를 입양할 거라고 상상이나 해봤니?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게 매슈 때문이라는 건 더 놀랍지 뭐야. 매슈는 여자애들만 보면 겁을 먹었는데 말야. 어쨌든 우리는 모험을 하기로 했고,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는 하늘만이 알겠지.' (85p)


 마릴라와 매슈에게 아이의 외모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점점 늙어가는 자신들의 생활을 도와줄, 눈치 빠르고 순진하고 튼튼하고 싹싹한 아이를 바랐다. 이 집 저 집으로 오가면서 살았던 어린 앤 셜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를 다시 스펜서 부인에게 데려가던 내내 고민하던 마릴라를 보면, 그리고 작 중에서 내내 외모에 치중하는 것은 허영심이라 주장했던 그녀를 보면, 그 성격이 얼마나 강직했는지 알 수 있다. 올곧고 강직하며 동시에 침착한 그녀 또한 실수를 하는 순간은 당연히 존재했다. 마릴라는 앤이 브로치를 훔쳐갔다고 생각하여 몰아붙이며 아이를 방에 하루 종일 훈육을 하겠다며 방에 가둬놓은 적이 있었다. 그 순간 앤이 했던 말들을 반항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아이를 키워보는 것도. 말 많고 밝고 명랑하고 엉뚱한, 자유로운 영혼과 함께 사는 것도 처음이었던. 무뚝뚝한 성격의 마릴라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여자애라면 겁을 먹던 매슈의 특이한 반응이 낯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로 마릴라는 앤을 깊이 사랑하게 된다. 혈연관계를 넘나드는 부모로서의 애정을 가지고, 훗날 장학금을 포기하고 돌아오려는 앤에게 여러번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죽은 매슈를 위하여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설득한다. 만약 마릴라가 앤을 애정으로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사람과의 관계는 절대로 일방적이지 않다. 다투고 의견을 나누고 서로 존중함으로 사람은 관계의 뿌리를 내린 데에 대한 결과를 얻게 되어있다. 그 예가 바로, 처음에 매슈보다 더 앤을 데려오는 것에 반대했던 마릴라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실수를 통해 그린게이블스와의 인연이 맺어진 앤 셜리는 엉뚱하고 자유로운 만큼 많은 실수를 했다. 다이애나를 실수로 취하게 하기도 했고, 길버트의 머리를 석판으로 치기도 하고, 교회에 갈때 모자를 꽃으로 치장하기도 하고, 앨런 부인에게 줄 케이크에 바닐라 대신 진통제를 넣기도 하고, 손님방에서 잠들었던 조세핀 위로 뛰어드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내기를 하며 지붕을 걷다 다치는 아찔한 사고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자유로운 영혼 앤은 자신의 실수를 통해 점점 더 성장하고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확실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마음을 다해 사과를 함으로 앤은 자신을 둘러 싼 관계들과 더욱 친밀해질 수 있었고, 작품 말미에서는 길버트와도 화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앤 셜리는 실수를 통해 만들어지는 존재이다. 실수를 하는 것으로 인하여 움츠러들고 소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정과 마음이 담긴 수습을 통해서 더욱 제 자신에게 자신감이 생기는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렇다. 앤 셜리와 같이!



 Anne with E

 앤 셜리는 꿈이 참 많은 아이였다. 또한 성장하는 아이답게 변덕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앤 셜리는 자신의 경험을 결코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았다. 지혜로웠고, 밝았다. 늘 엉뚱해 보이는 그 모습 속에서 어느 부분은 늘 철들어있던 앤은, 매슈와의 첫 만남 속에서도 거부에 대한 익숙함을 보였다.


 유난히 맑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만나서 정말 기뻐요. 혹시 저를 데리러 오시지 않는 건가 겁이 나서 어떻게 된 일인지 온갖 상상을 다하고 있었거든요. 아저씨가 안 오시면 저기 길 모퉁이에 있는 커다란 벚나무에 올라가 거기서 밤을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건 전혀 무섭지 않아요." (31p)


 여러 번 거부를 당했던, 버려진 기억이 있던 앤 셜리가 그냥 엉뚱했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앤이 이상하고도 새롭고, 반짝거리는 상상을 했던 것은, 자신의 상황을 잊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누가 봐도 깡마른, 주근깨도 많은 빨강 머리의 소녀는 살면서 자신이 예뻤다면, 이라는 상상을 아주 많이 했을 것이다. 마릴라는 외모에 치중하는 것은 허영심이라고 말하지만, 앤에게 자신의 외모는 콤플렉스였고, 빨간색의 머리는 상상으로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내새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작은 소녀에게, 끝에 'e'가 붙는 이름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유일하게 자신의 것 중에서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던 것. 누군가가 자신을 부를 때, 이름의 발음 끝에 겨우 'e' 하나가 더 붙는다고 기뻐했을 앤은, 어린시절이 아닌 지금 마주하고서야 나에게 그립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있었다. 앤 셜리, 네 수다에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과연 앤을 어떤 아이로 생각하고 있을까? 고작 길버트와의 짧은 로맨스를 만들어낸 아이? 혹은 망상에 사로잡힌 아이? 아니면 주근깨에 빼빼마른 소녀? 사랑스럽고 귀여운 소녀.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이 앤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그대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빨강 머리에 빼빼마른 소녀는, 많은 소녀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꿈꿔도 괜찮고, 배워도 괜찮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하도 도전해도 된다는 희망을, 그녀는 우리에게 주었고 꿈을 심어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소녀가 아닌 혁명가였다. 단순한 소설 속의 캐릭터가 아니라. 그녀는, 혁명가 그 자체일 것이다. 1890년대에서부터 100년이 지나고 또 30여년이 흐른 지금.. 앤 셜리, 네 수다에 용기 한 스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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