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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잉조랭이 Jan 19. 2022

적당히 성실하게, 열심히 우울하게

우울증과의 전쟁 1, 우울증이 생겨나는 이유_가족

처음에는 내가 우울증인지 몰랐다.

몰랐던 이유 중에 하나가, 우울증을 '정신병'으로 인식함으로 생긴 거부감으로 인해서였다. 우울증이라는 것은 네이버 사전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우울증, 즉 우울장애는 의욕 저하와 우울감을 주요 증상으로 하여 다양한 인지 및 정신 신체적 증상을 일으켜 일상 기능의 저하를 가져오는 질환을 말한다.
우울장애는 감정, 생각, 신체 상태, 그리고 행동 등에 변화를 일으키는 심각한 질환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전반적인 삶에 영향을 준다. 우울증은 일시적인 우울감과는 다르며 개인적인 약함의 표현이거나 의지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당수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운 질환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문가의 적절한 치료를 받는다면 상당한 호전을 기대할 수 있고 이전의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울장애 [depressive disorder]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병원)


…그렇다고 한다. 

우울증이라는 것은 단순히 내가 '아, 우울해. 오늘 우울한데 죽어나 볼까?'하고 일시적으로 이야기하며 농담따먹기를 할 수 있는 질환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하하호호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닌데다가, 우울증이라는 것은 사람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우울증이라는 것은 참 신기하다. 어느 순간에는 눈 뜨는 것을 정말 힘들게 만들고, 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을 길러주고, 멍때리면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간을 아주 많이 길러준다. 그래서 우울증이 정말 엄청나게 나쁜 시간일까? 싶으면, 그렇다. 안 좋다. 사람이 질병 가지는 것이 뭐가 좋은가. 우울증에 좋은 기대감을 가지지 말자. 우울증이 있다는 친구에게 "어우, 나도 우울증인 것 같아~" 따위의 말을 하지 말자. 그런 말을 하면 우울증 1-2위 국가를 다투고 있는 우리나라와 텍사스였나. 하여튼 그 곳의 차이점을 알려주고 싶어진다.

차이점은 참고로 자살률과 살인률이다. 결론은 당신의 말 한마디로 국적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우울장애의 특징은, 정신병이 아니라 질병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질병으로 분류되어있다면 알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다. 일단, 약으로 치료가 어느정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통계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OECD국가에서 우울증 발병률과 자살률도 1위이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조선일보 정석우 기자와 홍준기 기자가 쓴 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우울증약 복용률은 OECD국가 평균의 35%밖에 되지 않는다. 가장 우울증이 많은 나라인데, 우리가 우울증에 걸려있는데, 치료가 가능한 질병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어째서 약을 사용하지 않는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외국에서는 항우울제, 즉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우울증 치료에 사용되는 약물ㆍ이하 SSRI)를 비정신과 의사들도 처방할 수 있게 되어있다. 하지만 정신과를 가본 사람이라면, 신경과를 가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신과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병원은 처방전을 받아서 약국으로 가는 것이 아닌, 병원 안에서 약을 처방하게 되어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우리 나라는 정신 질환, 정신 질병에 대하여 굉장히 폐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구조에서 약을 받으러 가는 것이 기쁠 질환자가 어디 있을까? 코로나로 인한 우울증 유병률은 2020년에만 36.8%를 기록하고, 코로나 블루(corona blue)라는 단어까지 만들어 냈지만, 결국은 아주 쉬운 일어나는 상황 파악만 하고 치료는 못하고 있다.


병원은 폐쇄적이고, 치료를 받으러 가면 기록에 남는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인식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개소리를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공부해라, 공부해라. 심지어는 그런 책도 있었다. '10대 공부에 미치고, 20대 또 공부에 미치고, 30대 또 미치고, 40대에도 다시 한 번 공부에 미쳐라'하는 책이 있었다.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우리 나라의 사람들은 미친 사람은 싫어하면서 뭔가에 미치기를 바란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충성이면 더 좋고. 하지만 참 개소리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대체 왜 생겨났을까?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이유는, 독립과 전쟁을 겪고 여러 군사태를 겪고 경제적으로 모두 이겨내기 위해 생겨났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전화기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서 갑자기 접는 스마트폰도 만들어냈고, 이제는 3번 접는 스마트폰도 만들어가고 있고, 핸드폰 하나로 이제 밥을 시키고 공부를 하고 얼굴을 보는 일도 할 수 있다. 우리는 IT강국이다. 메타버스 시대로 들어가는 와중에, 한국인들은 참 신기하게도 멀티 페르소나를 가지고 일한다. 하나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심지어 여러개 모두 잘한다. 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열심히 사는 것도 좋은 일이다. 


태어나서는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5살에는 한글만 잘해도 천재요. 9살에는 구구단만 다 외워도 천재. 중학생때는 너무 뒤쳐지지만 않으면 되는데 이제 고등학생때는 갑자기 서연고(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정도는 가줘야지? ^^... 안되면 뭐, 4년제는 가줘야 하고. 학생이면 모름지기 공부를 해야지. 그치.


나는 학생이면 공부를 해야한다는 것에는 찬성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부모들은, 국영수 위주의 공부만을 원한다. 학생이 노래를 배우고 연기를 배우고 제빵을 배우고, 기술을 배우고 싶어해도, 안된다고 한다. 왜? 그것은 보기에 정상이 아니니까. 정상이 아니니 하면 안되니까. 나는 서연고에 갔든 못갔든 상관없이 너는 가야해.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다음과 같은 가스라이팅도 동반하면서 말한다. 


"나보다 널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라고.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그 나보다 널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에, 어느날 성공하여 돈을 벌어오는 아들과 딸을 보며, 누군가가 인터뷰를 한다면 "오호호, 저는 한게 없죠. 아이들은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고요, 밥은 그냥 먹였어요." 하는 상상을 해본적이 없는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단 하나도 없는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은, 집어치우자.


이미 우리는 알고 있지만, 자식이라서 당신의 거짓말에 속아주는 것 뿐이니까.


앞 글에서 나는 말한 적이 있다. 부모는 아가페(agapē)의 사랑을 한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가 말한 사랑의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무조건·일방적인 절대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다. 같은 그리스어인 '에로스'가 대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른바 자기 본위의 사랑을 의미하는 데 비하여, 대상 그 자체를 사랑하는 타인 본위의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서, 신약성서의 《마태오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고린토인에게 보내는 편지》 등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amor(사랑), caritas(자애) 등의 단어이다. 또한 3∼4세기경 그리스도교도들이 형제적인 결합과 사랑을 표하며 가난한 자, 특히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여인을 대접하기 위하여 각 가정에서 베풀던 만찬(晩餐:愛餐)의 뜻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가페 (두산백과)


그리스도가 말한 사랑의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무조건, 일방적인 절대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말. 절대적인 사랑은 부모가 하는가? 전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아이가 태어나서 부모의 도움을 받으면서 클 수는 있다. 그것은 강자가 약자를 위해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며,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게 만든 아이를 위해 당연하게 해야하는 일이다. 하지만 점점 아이에게 부모는 많은 결과물을 요구하며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에 비해 자녀들은 어떤가? 물론 말 안 듣는 자녀들은 있겠지만, 서너살 먹은 아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부모만을 사랑한다. 오로지 사랑만 쏟을 줄 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아이들은 자신의 모든 마음을 다 표현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폭력을 당하든지 아니든지 상관 없다. 그저 사랑한다. 그리고 자라가면서, 부모의 뜻을 거역하면서 점점 반항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데." 라고 하는. 내가 잃고 잃어가면서, 추운 차 안에서 김밥 하나 먹으면서. 학원을 뺑뺑이 돌면서, 학원을 코피 흘려가며 다니면서. 대학에서 교수에게 대차게 까이고 직장에서 프로젝트를 까이고. 그리고 결국 돌아오는 "잘하는 짓이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할때 더 잘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니?" 하는 무차별적인 비난에 대한 분노.


자녀의 반항은 첫사랑을 잃은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다.




자녀가 당신에게 불만을 표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원하는 일을 이뤄주지 못하는 상실감에 빠지면, 당신도 분명 우울감에 빠진다. 남성의 경우는 '내가 죽어라고 일해가면서 먹이고 입혀놨더니.' 라던가. 여성의 경우는 '내가 일도 포기하고 건강도 잃어가며 너를 낳고 길러서 키워놨더니.' 에 대한 분노. 한국인은 서로 분노에 차있다. 서로 사랑하지만, 절대적으로 서로를 위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분명 내가 좋아서 한 사랑인데. 어느 순간에는 기대를 하게되고 그 기대감이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있다. 


이 글을 쓰는 나에게 누군가는 "네가 뭘 알아, 네가 의사야? 우리에게도 입장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당신의 입장 때문에 누군가가 죽어간다면, 당신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당신은 부모에게 헌신하는 사람이 아닌 살인자다.



당신은 이것을 모르지 않는다.

당신도 이것을 겪었다.

하지만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당신이 그저 불편할 뿐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가치가 자녀와 부모, 서로에게만 의존되는 관계라면 다시 생각해보라. 그 것이 정녕 옳은가에 대해서. 그리고 생각해보라. 과연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내가 헌신하는 부모라고 해서 그들의 아픔이 아프지 않은지. 나는 이렇게, 그들은 이렇게 살았으니까 당연하게 아픈 것은 누구나 아픈 것인지.


아픈것을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 묵어져서 고름이 되어버리는 것이 우울증이다.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노랗게 터질날만 기다리는, 인정을 결핍당한 질병이 바로 우울증이다.




우울증이라는 것은 위와 같은 이유가 첫번째로 시작된다. 나의 기대감에 대한 결핍에서 온다. 상냥한 말과 위로를 바랬던 누군가에게, 갑작스러운 배신과 비난이 느껴질때 시작이 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상처입은 이 영혼으로, 누군가를 다시 상처입혀야 하는가? 화풀이를 해야하는가? 가족조차 이해해주지 않는 나의 우울을 어디에 표현하고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파악하라. 인식하라. 

나의 우울의 시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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