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매번 거대함과 사소함의 대비를 말한다. 우리가 사는 공간은 대개 산과 산 사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혹자는 산을 보고 숭고미를 말한다. 나는 산에서 골짜기의 마을을 보고 인간에 대한 숭고미를 느꼈다.
도시의 어느 언덕, 혹은 빌딩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면 사람이 작게 보인다. 길과 골목을 거니는 작은 사람을 하나 눈으로 부여잡고 쫓아다녀보면, 그 사람의 삶의 구역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동선은 대개 고개를 움직일 필요 없는 범위 내에 한정된다. 한 인간의 일상이 가진 삶의 구역은 그리 넓지는 않다.
새벽 1시. 달이 사그라든 제2연화봉 대피소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영주시가 별 보다 더 반짝이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불빛은 가로등이거나, 어느 편의점이거나, 잠 못 이루는 어느 방의 불빛이거나, 밤늦게까지 일하는 택시이거나 하겠다. 서울의 어느 고시원에 살 때, 나는 옥상에 자주 올라가곤 했다. 낮에 빼곡했던 차들의 행렬은 새벽이면 한산해지는데, 그 한산함을 메꾸는 것은 대부분이 야간 택시였다. 그리고 간혹 맥도날드 딜리버리 오토바이가 보이기도 했다.
산에 오르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공간만이 흔들리며 보일 뿐이다.
높고 험준하게 솟은 산'들'을 산악이라 한다. 산악이라는 단어에는 '~들'과 같은 복수형의 의미가 담겨있다. 홀로 솟은 산은 산악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저 산 일 뿐이다.
거쳐온 길을 본다. 지냈던 곳과 지나친 곳을 본다. 다시 가야 할 곳을 본다. 가야 할 길을 걷는다.
철쭉이 유명한 소백산의 봄은 분홍과 싱그러운 연두빛이다.
여름엔 철쭉이 지고 싱그러움은 짙어져 초록으로 변한다.
초록은 노랑과 붉음으로 갈음하여 가을을 만끽한다.
겨울산은 하얀 것과 검은 것만이 남는다.
화려하지 않은 희고 검은 것뿐이다.
내가 언제 아버지에게 겨울의 소백산을 가자고 했을 때, 아버지는 "겨울에 소백산을 왜가?"라고 답을 하셨다.
소백산은 봄의 산이라며, 철쭉이 필 때 마주하는 산이라며.
하얀 것과 검은 것
눈 덮인 땅과 앙상한 나뭇가지
명도가 짙은 겨울산
대비가 강한 겨울산
겨울산은 흑과 백의 향연이다.
겨울이 아니면 턱수염이 길게 난 듯한 능선의 나무를 마주하지 못한다.
겨울이 아니면 나무에 덮이지 않은 산의 속살을 살피지 못한다.
겨울이 아니면 산과 산의 깊은 경계를 세어보지 못한다.
인생에도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는가
나는 대개 비수기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지없이 멀리 구름이 밀려온다. 사진을 찍고 한 시간 정도 지나니 구름이 온 산을 뒤덮었다.
아마 저 구름일게다.
신선봉.
내가 본 검은 것들은 모두 하얗게 덮였다.
그러나 사라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첫 날 다친 발목이 계속 말해주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