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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환수 Oct 02. 2018

자전거 헬멧 의무화

헬멧은 꼭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법으로 강요하는 건 사양합니다.

요약

나는 자전거 헬멧을 의무화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에 반대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헬멧을 착용하면 사고시 사망률을 현저하게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자전거 사고 사망자가 많은 더 중요한 요인은 환경과 제도 등 도로 제반 여건이 자전거 타기에 좋지 않다는 점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자전거 타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질 개연성이 높아진다.

헬멧 착용을 의무화하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 숫자가 크게 줄어든다. 특히 요즘 자전거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공유자전거는 직격탄을 맞는다.

결과적으로 헬멧 의무화가 자전거 저변 축소로 이어지고, 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 자전거 친화성이 더 악화된다.

결국 헬멧 의무화는 자전거 이용자 감소를 낫고, 이용자가 줄어들면 자전거 친화성은 악화되고, 결국 자전거 사고율이 줄어들 수가 없다. 이는 다시금 자전거 사용자 감소로 이어지기에 악순환이 강화된다.

결국 헬멧 의무화 → 자전거 이용자 감소 → 자전거 친화성 악화로 이어지는 고리가 돌고 돌아 결국 자전거 수송 분담률을 감소시킬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나는 자전거 헬멧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자전거 헬멧 의무화 법안에는 반대하는 것이다.


시작하며

9월 28일부터 자전거 헬멧을 의무화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발효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자전거 동호인, 애호가들이 이 법안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떡밥을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페이스북에서 종종 맨머리 유니온 같은 페이지의 글을 공유하면서 내 의견을 비춘 적은 있지만 작정하고 길게 글을 쓴 적은 없다. 어차피 나나 우리 가족은 옛날부터 자전거를 탈 때 웬만하면 헬멧을 썼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상관없는 사안이긴 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헬멧 의무화 법률에 반대하는 주장을 안전벨트나 어린이 카시트 단속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하고 비슷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이렇게 키보드에 손을 얹기로 했다. (나는 안전벨트나 어린이 카시트 관련해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까다롭다. 이것 때문에 부모님이나 장모님하고 애미애비도 없이 싸운 적도 있다. 애가 운다고 카시트에서 꺼내서 애를 안는다든가 하면 나는 차를 움직이지 않는다. 혹시라도 우는 아이를 정 안아서 달래야 하겠다면 나는 차를 안전한 곳에 세운 후에 그렇게 하라고 한다. 타협의 여지는 없다.)


우선 시작하기 전에 이 말은 해야 되겠다. 나는 자전거를 탈 때 거의 항상 헬멧을 쓴다. '항상' 앞에 '거의'를 붙인 이유는, 아주 가끔은 안 쓸 때도 있긴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출퇴근 길에 전철역과 회사 사이에서 이동할 때 공유자전거를 탄다거나, 동네에서 잠시 이동하기 위해 생활차(우리의 친구 철티비!)를 탄다거나 할 때는 헬멧을 안 쓰기도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2014년부터 지금까지 자전거로 6,000 km 넘게 움직이는 동안 헬멧을 쓰지 않고 움직인 거리는 아마 100 km를 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들, 누가 취미를 물었을 때 자전거를 탄다고 답할 만한 사람들은 아마 나와 거의 비슷할 것이다.


자전거 동호회의 단체 주행 공지에 “안전장구(헬멧, 앞 뒤 라이트 등)가 없으면 참가할 수 없습니다” 같은 문구가 없는 경우를, 적어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자전거를 열심히 타는 사람들은 헬멧에 쓰는 돈을 그리 아까워 하지 않는다. 자전거용 헬멧이라는 게 가격이 저렴한 놈이라도 (심지어 2-3만원 짜리라도) 국내에서 제대로 인증 받고 공식적으로 판매하는 제품이라면 충분히 안전하다. 그런데도 많은 동호인들이 그 열 배는 족히 될 만한 금액도 아끼지 않고 쓴다. 다섯 식구가 사는 우리 집에도 자전거 헬멧이 열 개 가까이 있다. 적지 않은 돈을 쓰더라도 사고가 났을 때 제 몸 바쳐 내 머리를 지켜주는 헬멧에 몇 십 만원 쓰는 건 전혀 아깝지 않다는 걸 자전거를 열심히 타는 사람들은 아주 잘 안다. 자전거 헬멧 의무화에 적극 찬성하는 자전거 안 타는 사람들보다 충분히 잘 안다.


그런데 이렇게 헬멧의 중요성을 잘 아는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전거 헬멧 의무화에 반대하는 걸까?


본론

우리나라는 교통사고가 많은 나라다. 위키피디아에서 국가별 교통사고 사망자 통계 모음 페이지(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countries_by_traffic-related_death_rate)를 열고 주행거리당 사망자 수 순으로 정렬하면 우리나라가 1등이다. (물론 이 통계 자체가 좀 헛점이 있어서, 교통사고 사망자가 정말 많은 나라들은 주행거리당 사망자 수 통계 자체가 없다. 그러니 그나마 좀 양호한 나라들 중에서 우리나라가 열악하다는 정도로만 이해해 두자.) 우리나라의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차량 주행거리 10억 km당 15.6명이며 체코,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일본, 스페인이 그 뒤를 잇고 있다. 10억 km당 사망자 수 5위인 일본도 8명 정도로 우리나라에 비하면 거의 절반 수준에 가깝다. 꽤나 놀랍게도 단순하게 거주자 10만명당 교통사고 사망자 수로 따지면 우리나라는 9.3으로 유럽 평균과 같고 미국(10.6)보다는 조금 낮다. 일본(4.7)보다는 두 배쯤 높다.



교통사고가 많은 만큼 교통사고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전거가 연루된 교통사고도 많다. 2018년 6월에 나온 도로교통공단 자료를 보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5년간 총 28,739건의 자전거 사고가 있었고, 540명이 사망, 30,357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망자의 경우 확실히 헬멧을 쓰지 않은 비율이 높다. 안타깝게도 이 기사에는 상세한 통계 내용은 없어서 더 자세한 얘기는 하기 힘들다. 하지만 저 표만 봐도 헬멧을 쓰는 게 자전거 사고시 부상을 줄이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전거 정책 관련해서 꽤 잘 알려진 사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전거를 많이 탈수록 자전거 사고 사망자 수는 줄어든다는 점이다. 아래는 OECD에서 2013년에 내놓은 보고서의 자료를 바탕으로 포브스에서 만든 그림인데, 노란색 막대는 자전거 주행거리 10억 km당 자전거 탑승중 사망자 수이고, 파란색 점은 해당국 거주자 1인당 연간 평균 주행거리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평균 주행거리가 196 km나 된다는 게 좀 놀랍긴 한데, 한 달에 1000 km씩 타고 그런 분들이 수두룩빽빽하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어쨌든 아래 차트에서 볼 수 있듯이 자전거를 많이 탈수록 주행거리당 사망자 수는 크게 줄어든다. 그만큼 자전거를 많이 타는 나라일수록 자전거가 더 안전해진다. 이건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자전거를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제도와 도로 체계 등을 많이 손 볼 수 밖에 없는 (말 뿐인 당위가 아니라 실질적인) 원동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라고 단정지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인구당 자전거 대수도 사실 저 순위랑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2015년 기준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스웨덴, 핀란드, 중국, 스위스, 벨기에 순)


그림 출처: Forbes, 데이터 출처: OECD


그리고 저 차트에서 우리나라보다 왼쪽에 있는 나라들 중 전국민에 대해 자전거 헬멧 착용을 법률로 의무한 나라는 한 군데도 없다. (프랑스는 12세 미만 자전거 탑승자 헬멧 의무 조항이 있지만, 자전거 헬멧 착용이 전국민에 대해서 법률로 의무화되어 있는 나라가 별로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자전거 헬멧 착용을 의무화한다고 할 때, 우리나라의 위치는 저 차트에서 왼쪽으로 갈까 아니면 오른쪽으로 갈까? 나는 헬멧을 의무화하면 자전거 이용자 수는 줄어들고 그만큼 저 차트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할 거라는 데 10만원 쯤 걸 수 있다.


저 차트에서 순위권에 있는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같은 나라들은 자전거가 생활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어 보행과 비슷하게 취급을 받기 때문이어서 그런지 자전거 헬멧을 착용한 사람의 비율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적다.


네덜란드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풍경


많은 이들이 자전거 헬멧 의무화를 안전벨트하고 비교한다. 하지만 안전벨트를 강제로 매게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자동차 탑승을 줄이는 일은 없다. 자꾸 외국 얘기 해서 불편하긴 한데, 저 위에 자전거 1인당 주행거리와 10억 km당 사망자 수를 비교한 표에 등장하는 나라 중에서 우리나라보다 안전벨트 안 매는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다. 교통이 안전한 나라일수록 안전벨트는 열심히 매고 자전거 헬멧 의무화에는 회의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어떤 활동을 하든,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은 헬멧을 쓰고 있을 때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훨씬 안전해진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헬멧을 쓰면 잠 자다가 머리에 무거운 짐이 떨어져서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을 때 사망률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다. 자동차 운전을 할 때도 헬멧을 쓰면 훨씬 안전하기 때문에 자동차 경주를 하는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헬멧을 쓰고 안전벨트도 일반 승용차보다 훨씬 강력한 4점식이나 6점식 안전벨트를 사용한다. 하지만 어디에나 적정선이라는 게 있어서 모든 자동차 모든 좌석에 앉는 사람들에게 헬멧을 쓰게 한다거나 6점식 안전벨트를 매게 하진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자전거 헬멧 사용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거의 반드시 헬멧을 쓰고, 우리 가족들에게도 헬멧의 중요성을 자동차 안전벨트나 유아 카시트의 중요성 만큼이나 강하게 강요하는 편이다. 하지만 걸어다닐 때나 자동차에 탔을 때 헬멧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으며,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일반 보행과 비슷한 수준의 자전거 활동시에 헬멧 착용을 강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P.S. 우리와 비슷한 길을 갔던, 즉 별 규정 없다가 헬멧 의무화 법을 제정했던 국가들에 대한 연구 결과가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1410838/?tool=pubmed 에 실렸는데, 결론은 “분명하게 도움이 된다는 증거가 없음”이었다. 자전거 출퇴근자 수만 1/3 감소했다. 그리고 그런 나라들은 자전거 사용자 안전 면에서 그다지 뛰어난 나라도 아니었다.


P.P.S. 자전거 사용을 장려하는 정책방향은 국민 건강증진 면에서 유의미하다. 사고로 인한 사망 및 부상의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의 사망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사망률에 비해 20-30% 유의미하게 낮다는 결과들이 있다. https://read.oecd-ilibrary.org/transport/cycling-health-and-safety_9789282105955-en#page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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