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료료야. 알다시피 희로애락을 적는 중이지. 이번에는 두 번째, 노여움에 대해 말할 거야. 그거 알아? 노여움은 공주님 같은 거. 고귀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를 가진 존재란 거. 그래서 말이야. 이곳에 잠시 머무는 만큼은 나를 공주님이라 불러줄래? 료료 공주님이라고 말이야. 브런치에서 공주님이라 불릴 생각 하니 정말 아찔하다. 료료 공주님이라니. 싫다고? 부르기 싫다고?! 그래도 불러줘, 불러줘. 너도 나에게 공주님이고, 왕자님이야. 우린 모두 본문의 노여움이니까 말이야.
그럼, 다시 소개할게.
안녕, 난 료료 공주님이야.
료료 공주는 공주답게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꼿꼿이 등을 펴, 소리를 지르는 거야. 하지만 언제 그 높은 곳으로 올라가냐고. 올라갈 수 있는 시간과 여력이 나에게 있을까? 이미 화가 났더라면 그런 상황이 아닐 가능성이 제일 높은 거잖아. 그런 생각을 해.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를 때 이미 쏟아져 버린 상태라 수습이 몹시 어려운 경우가 많을 거야. 아무래도 공주답게 판결의 노여움을 내놓아볼까 해.
소리 지르는 아이 '볼륨을 낮춰주세요'
칼춤의 판결
어제 이런 사건이 있었어. 나에겐 초등학교 4학년 딸이 있어. 그녀는 집에서 문제집을 푸는 계획이 정해져 있어. 물론 내가 정한 거야. 그녀도 동의는 했어. 동의는. 그런데 요즘 배드민턴과 수영을 배우러 다니면서 집에 오면 피곤해지는 거야. 집에 오면 할 일 들을 뒤로 미루고, 쉬거나 다른 일을 찾더라고. 그런 과정을 끊임없이 목격한 노여움이 쉬지 않고 점점 불타오르기 시작한 거야. 불이 붙어버렸을 때 스스로 꺼지는 연습을 자주 했지만, 결국 그녀에게 소리치고 무너지고 말았어. 눈을 감고 서 있으라고 외쳤지. 하지만 그녀는 긴장했는지 계속 팔다리가 간지럽다며 투덜댔어.
료료 공주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생명체인 거 알지? 그녀는 하필 소중하게 감자 껍질을 감자 칼로 벗겨내고 있었어.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어. 분노가 폭발한 료료 공주는 철제 바구니에 감자 칼을 내려친 거야. 생각보다 강하게 쳤는지 뭔가 날아가는 걸 본 거 같아. 순간 놀라 주위를 돌아봤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서 착각인지 알았어. 하지만 감자 칼에 걸려 있는 칼 부분만 안 보이는 거야. 딸들에게 급하게 말했어. “주방 근처도 오지 말라고.”
둘째에게는 얼른 자러 들어가라고 했고, 첫째는 알아서 눈치채고 엄마 힘내라며 응원해 주며 제방으로 갔어. 료료 공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칼을 찾기 시작했어. 싱크대에 있는 음식 종량제 봉투로 들어갔나 싶어 탈탈 털어 찾아보기도 했어. 하지만 음식 냄새만 풍길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혹시나 칼을 밟을까 봐 무섭기도 했지. 화를 참지 못하고 이런 행동을 했다는 자체에 료료 공주는 반성하려 노력했어. 여기저기 한참을 찾다가 결국 그릇 건조대 너머로 넘어간 칼을 찾을 수가 있었어. 정말 안심과 동시에 잘못 날아갔으면 아이들한테나 아니면 내가 맞았을 수도 있었는데 정말 큰 일 날 뻔했다 싶었어. 갑자기 슬퍼지려 했지만 이제 아이들에게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둘째 방으로 들어가서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로 옆에 가서 사과했어. “미안해. 정말. 네가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일보다 내가 훨씬 더 잘못한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소리치거나 물건을 던져서는 안 되는데 내가 정말 잘못했어.” “엄마 괜찮아?” “아니? 많이 놀라기도 하고 너희들한테 아주 미안하지. 너는 괜찮아?” “나도 미안해. 엄마.”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한 번 더 말하지만 내가 잘못한 게 맞아. 다음에는 절대 그런 행동하지 않게 노력할게. 언니한테도 가봐야겠어. 얼른 자. 사랑해.” 라며 이불을 덮어주고 나오려는데 덥다며 이불을 걷어차는 그녀를 보았어.
첫째 방으로 갔어. 그녀의 방은 문이 닫혀 있었어. 노크했지. 방문 밖에서 외쳤어. “아까 동생한테 소리치고 감자 칼 날아가는 거 옆에서 본다고 놀랐지? 엄마가 미안해.” 첫째가 말했어. “나는 엄마 다쳤을 까 봐 걱정했어.” “응. 하나도 다치지 않고, 잘 찾았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사랑해.” “나도 사랑해.” 서로 고백을 외치며 우리는 다시 헤어졌어. 물론 방문 사이로 두고 말이야. 그 짧은 시간에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로 큰일이 벌어질 뻔했어.
풀이 죽은 료료 공주
료료 공주는 풀이 죽어, 샤워하고 이제 글을 써야지 했어. 갑자기 첫째가 달려오며 “엄마 방금 엄청 큰 소방차 여덟 대가 지나갔어!” 안 그래도 씻고 나오는데 사이렌 소리를 들려 걱정했었어. 곧바로 남편에게 문자가 왔어. 집에 오고 있다고. 일찍 오나 싶어 기뻐서 어서 오라고 했지만 사실 이제 글 써야 하는 데 남편이 오니까 여러 감정이 생기긴 했어. 이유는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남편이라서 말이야. 자기랑 잘 때 같이 안 자고, 따로 컴퓨터 앞에 있어서 많이 외로워하는 녀석이야.
공주는 참 바빠. 그래도 전날 회식을 하고 늦게 왔던 남편이라 안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갑자기 바깥에 차 두 대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고요한 밤에 굉음처럼 울렸어. 갑자기 불안해져 남편에게 이모티콘을 날리며 조심히 오라 했더니 귀여운 이모티콘으로 답이 왔어. 그가 집에 오고 나서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 “집에 무사히 와줘서 고마워. 아까 큰일이 있을 뻔했는데 우리에게 아무 일도 안 생겨서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갑자기 무서워졌었어.” 그리곤 감자 칼 사건에 대해 말했어. “진짜 큰일 날 뻔했지?” “사람 그렇게 쉽게 안 다쳐.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아.... 아니야?”
남편은 몇 마디로 료료 공주가 빠져있던 심난한 구렁에서 아주 손쉽게 건져내었어. 감자 칼의 칼 부분은 위험하지 않은 걸까? 감자를 깎을 때는 잘 벗겨지지만 날카롭지는 않아서 괜찮았을까? 하지만 그녀는 같이 걱정해 주거나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걸까? 남편의 이상적인 이성에 순간적으로 주먹을 날려주고 싶었어. 그래도 조금 전의 무사함을 떠올리며 마음을 차분히 먹기로 했어. 그다음 편은 슬픔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