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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것의 일기] 그만 둬 / 말아

by 화랑

며칠전부터 가슴이 답답하다. 지난주 목요일날 일하다 발톱이 들려서 병원에 갔다. 별일 아니라 생각했는데 주말 사이 염증이 심해져서 반깁스까지 했고 걷기가 불편해졌다. 맘 같아선 이번주 내내 병가 쓰고 싶었지만 당장 금요일까지 내야하는 업무가 폭탄처럼 쌓여있어... 어쩔 수 없이 출근했다. 절뚝절뚝 걸어다녀야되지, 발은 화끈화끈 욱신거리지, 이와중에 애들은 3월이 지나니까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업무는 폭탄이고,, 정말 환장의 일주일이었다.


업무 얘기를 더 하자면 학교에서 나한테 주어진 예산이 약 3,000만원 이상이다. 회계 공부한 적? 없습니다. 교대에서 행정 업무 알려주나요? 전혀요. 그렇지만 어쨌든 돈은 떨어졌고 이걸 성립전 예산요구 / 계획서 작성 / 운영위원회 심의 / 품의 / 결과 보고 등등으로 처리해야한다. 일개 교사가.. 그것도 1학년 담임이.. 오후엔 상담이 있으니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을 쪼개 일해보려고 하는데 1학년 애들을 끼고 모니터의 예산 세부 내역이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네 개의 사업이 각각 인건비 / 운영비 / 업무추진비로 나뉘어 핸드폰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리는데 애들은 끊임없이 찾아오고, 엑셀도 한글도 다 모르겠고, 나는 갑자기 숨이 턱하고 막혔다.


8시반에 출근해서 4시반에 퇴근하는 걸 다들 부러워한다. 그러나 애초에 근무시간이 왜 이렇게 잡혔는지는 알까. 점심시간 없이 8시간을 온전히 일만 하기에 일찍 퇴근하는 것이다. 그날 나는 8시에 학교에 도착해 정말 한숨도 쉬지 못했고 퇴근 시간이 되었을 땐 집에 갈 힘이 없었다. 그래도 더 늦어지면 막히니까, 절뚝거리며 차에 타서 왼발로 브레이크 오른발로 엑셀을 밟는데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갑갑했다. 운전자 본인도 멀미를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졸음운전이 될까봐 창문을 열고 약 50분간 달려 집에 도착했을 땐 기절하듯 소파에 쓰러졌다.


이와중에도 나는 '이렇게 체력이 약한데 다른 일은 꿈에도 못 꾸겠구나'라며 절망했다. '교사는 다른 일보다 쉽고, 교사하면서 힘들면 다른 일도 못한다'라는 부모님(+주변 선배교사 및 인터넷 커뮤니티)의 오랜 가스라이팅에 세뇌된 나.. 세뇌가 얼마나 무섭냐면, 저 말에 반박하기 위해 아홉 명을 인터뷰하고 그걸로 책까지 냈는데도 정작 작가 본인이 아직도 거기서 못 벗어났다.


기절한 아내 대신 저녁 식사를 다 차린 남편은 내 얘기를 듣다 새로운 의문점을 제기했다.

"그거 공황장애 아니야?"

아... 인터넷에서 공황장애 증상을 찾아보는데 가슴 두근거림이 제일 먼저 떴다. 그 다음 땀, 오한, 메스꺼움, 어지러움 그래 이거잖아! 체력 이슈인줄 알았는데 멘탈 이슈였구나..? 그치만 두려움, 공포, 죽을 것 같은 불안까지는 안 느꼈으니 우선 셀프진단을 유보했다. (재수학원 다닐 때 1층 로비 화장실에서 공황장애를 겪은 적이 있는데 확실히 그때만큼은 심하지 않아서 일단 넘기기로 했다. 자기착취에 능한 한국인답다..)


다음날에도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애들이 내 말을 안 들으면 어지러움과 갑갑함이 극에 달했다. 잠시라도 고요하고 싶었다. 오죽하면 유튜브에서 5분 어린이 명상을 찾아 틀어줬는데 그 순간에도 역시 교실은 고요하지 못했다. 방과후에 학부모 상담을 한시간 반 정도 하고, 안되는 머리를 쥐어짜내 겨우 행정 업무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드레싱 바꾸러 정형외과에 갔는데..


새비지한 의사선생님이 갑자기 내 발톱을 뽑았다. 드레싱 바꾸는 날이라면서요? 왜 갑자기 뽑아? 내가 제발 하지 말아달라고 경악했는데 고름 때문에 안된다면서 뽑아버렸다. 그렇게 나는 살면서 제일 끔찍했던 순간 TOP3를 갱신하였다. 와.. 호들갑 떠는 나 때문에 원장선생님이며 간호사님이며 처치실에 사람이 북적거렸고 나는 너무 민망하고 죄송하면서도, MBTI F인 사람은 정형외과 의사 못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왜냐면 그 순간에도 발톱 뽑은 의사분은 이것보라고 고름이 이만큼이나 있다면서 자랑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소독 남았어요. 이게 더 아플 거예요."

서슴없이 소독까지,, 정말이지 새비지 그 자체...


발톱이 아파서일까 우울감 때문일까 밤새 가슴이 갑갑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그러면서 다시 한번 이직을 고민하게 된다.


약대 입시 찾아보기 -> 금수저 아니면 약사도 어렵다는 글을 봄 -> 근데 붙어도 6년을 어떻게 다녀? 김칫국 마심 -> 남편한테 "나 뒷바라지 해줄래?" 괜히 떠보기(누가보면 이미 붙은줄) -> 고딩 때 화학, 생명과학 공부했던 거 떠올림(놀랍게도 나는 둘 다 II과목까지 다 했다. 그러곤 이다음해 문과로 전향해 교대를 온다. 시간낭비의 아이콘) -> 못하겠음 -> 포기


아니야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지. 정승제쌤이랑 강형욱도 그렇게 말했어. -> 책방에서 일하고 싶다 -> 대전 프렐류드나 다다르다에서 알바하는 상상함 -> 행복하겠다 -> 근데 거기서 나를 받아줄까? -> 받아준다 해도 40대 때는? 50대에도 책방에서 알바할 수 있나? -> 확실한 직업전문성은 있었으면 좋겠는데 -> 절망


결국 1년 전이랑 똑같다. 지긋지긋한 망상을 2025년에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다들 마케터고, 크리에이터고, 창업자고, 어떻게 성공해서 멋지게 사는데 나만 또 이러고 있다. 책을 만들고 진로 고민이 씻김굿처럼 다 내려갔다고 생각했다. 훌훌 털어버리고 새 학교에서 상쾌한 시작을 하고 싶었다. 근데 또 왜 이러고 있을까? 와중에 일기장에나 쓸 글을 브런치에 올린다. 어이없게 글 쓰는 건 또 재밌다. 독자 입장에선... 모르겠지만.. 나랑 비슷한 사람 누군가는 이걸로 위로받지 않을까..?


각설하고.. 여전히 가슴은 뛰고,, 다음번엔 정신과 상담 후기로 찾아오겠습니다. 혹시 몰라요 발톱 나으면 마음까지 괜찮아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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