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6년’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
이~ 고거 고거이 좋은거 같은디?
어? 진?
그려~ 미진, 심미진, 고거 '보배 진' 말고
뭐라 혔어요?
으잉? '나아갈 진' 말이여?
그려요. 미진, 이름은 이쁜디,
뜻은 씩씩하고 좋잖여~
당신 바람대로 씩씩하게 앞을 보고 나가...
"탕!"
"와장창! 퍽! 털썩...
오메! 설아야 이게 뭔 일이 당가!
설아야 설아야! 설아야!!
응애~ 응애~ 응애~
어린 미진(한혜진 분)의 어머니는 그렇게 집으로 날아든 한 발의 총탄이 머리를 관통해 목숨을 잃었다.
정혁(임슬옹 분)의 누나는 어린 정혁이를 찾아 나섰다가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숨졌다. 정혁은 복부에 총탄을 맞은 누나의 내장이 쏟아져내리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다. 진배(진구 분)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사망자들의 더미를 헤매다가 죽어 썩어져 가던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했고, 갑세(이경영 분)는 계엄군으로 광주도청 진입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의도치 않게 시민군을 사살하고 넋을 잃었다.
봄바람이 부는 평범한 5월의 어느 날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일이 있은지 26년이 지났다.
미진은 국가대표 사격 선수로 성장했지만,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합숙훈련에 빠지기 일쑤다. 정혁은 누나의 바람대로 열심히 공부해 경찰이 되었다. 진배는 어머니와 함께 포장마차를 운영하다가 두둑한 배짱과 깡으로 광주 조폭 두목 수호(안석환)의 눈에 들어 수호의 오른팔이 된다.
이들에게 갑세와 그의 아들 '주안(배수빈 분)'이 찾아왔다.
26년 전, 광주에서 부모와 형제를 무참히 사살했던 '그 사람(장광 분)'을 단죄하자는 것. 갑세와 주안은 그 사람이 머물고 있는 안가의 위치와 경호상황, 일정과 동선을 파악하고, 그를 저격할 수 있는 건물을 확보하는 등 많은 준비를 해왔다.
그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 이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계엄군이 다름 아닌 갑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진배의 분노가 폭발하며 갈등하자 미진은 단독으로 그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나선다. 그 사람의 이동경로에 있는 신호등 하나를 정혁이 잡아주면 그때 총으로 저격하려는 것.
미진의 작전은 아쉽게 실패로 돌아가고 이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는다. 진배는 미진을 극적으로 구조해 자신의 조직이 있는 광주로 피신시킨다. 정혁은 충격을 받고 경찰로 복귀해 그 사람 암살 계획을 폭로한다. 갑세와 주안은 '플랜 B'에 돌입, 자신이 운영하는 경호회사가 그 사람의 경호를 맡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로비를 펼친다.
광주 5.18 민주묘지를 찾은 미진과 진배.
저기 우리 엄마...
저짝이 울 아부지...
이러고 본께 참말로 거시기 해부네요...
긍게, 이러고 본께 싹 다...
가족 같아 보이는 구마이...
저 짝 하고 이 짝 하고 참말로...
거시기 해부네...
그냥 시원하게 울어 불지. 한 번쯤은...
나중에... 한 번에 몰아서...
갑세와 주안이 마침내 로비에 성공했다. 그 사람을 직접 만날 수 있는 D-Day도 잡혔다.
갑세와 주안이 그 사람을 만나는 동안 진배는 외부에서 소란을 피워 경호병력을 분산시키고, 예측된 경로로 그 사람이 이동할 때에 미진이 원거리에서 저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한편 경찰로 복귀한 정혁은 자신이 아는 모든 정보를 상관인 '최계장(김의성 분)'에게 보고하고, 최계장은 경찰력을 동원해 이들의 검거계획에 나선다.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D-Day가 다가왔다.
갑세는 마침내 그 사람을 만났다.
오늘 나는 당신 대답 들으러 왔습니다.
당신?!
26년 전 오늘, 정확하게 1980년 5월 오늘, 기억하십니까?
당신 목숨 당신 태도에 달렸습니다.
허허 이 친구... 이게 대관절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 이야기는 다 했잖아. 잘 들어,
그건 군인들의 자위권 발동이었어.
나한테 보고하기 전까지 난 몰랐다니까.
몰랐다?! 내가 계엄군이었소.
그건 당신의 명령이었소.
사실대로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모든 건 조용히 끝날 겁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조용히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신은 끝났지만, 난 끝나지 않았소. 당신은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 무고한 시민들을 군화발로 짓밟았고 총칼 아래 피 흘리며 쓰러지게 했소. 그런데도, 26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마디 한마디 사과도 없었소.
어허. 이거 점점 지루하구먼...
난 또 무슨 말인가 했네.
갑세는 권총을 빼들고 그 사람을 향해 발사했지만, 안타깝게도 빗나갔다. 오히려 총소리를 듣고 들어온 경호원의 총에 갑세와 주안 모두 처참히 쓰러지고 말았다. 예측된 경로로 이동하던 그 사람을 미진이 저격했지만, 간발의 차로 실패한다. 마지막 남은 진태가 광주 조폭 후배들의 육탄전에 힘입어 간신히 안가에 진입했다.
그 사람을 잡은 진태, 미진이 저격할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한다.
안돼! 위험해! 너도 위험해!
생각하지 마! 생각하면 지는거여!...
26년이여 26년!
지금을 놓치면 앞으로 우리 또 뭣을 헐 수 있겄냐!
미안해만 허덜 말고...
쪽팔려만 허덜 말고...
세상 탓 좀 그만 허고...
인자 쫌 다 털어 불자!!!
"탕!"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진다.
최근, 자유한국당이 국회에서 공청회를 열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매도하고, 5.18 유공자들을 '괴물집단'이라고 폄훼해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자리에서 이종명 의원은 "5.18 사태가 발생하고 처음에는 5.18 폭동이라고 했는데, 시간이 흘러 민주화 운동으로 변질됐다. 정치적 이념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에 의해 폭동이 민주화 운동이 됐다"라고 발언했다. 김순례 의원은 "방심한 사이에 정권을 놓쳤더니 종북 좌파들이 판을 치며 5.18 유공자라는 괴물집단을 만들어 내 우리의 세금을 축내고 있다"라고 했다. 특히 발표자로 나선 지만원 씨는 "5.18은 북한 특수군 600명이 주도한 게릴라전이었다. 이른바 '광주의 영웅'들은 북한군에 부화뇌동 부역한 부나비, 무개념 아이들이었다"며, 특히 "전두환은 영웅이다. 그 순발력과 용기가 아니었다면, 이 나라는 쿠데타 손에 넘어갔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과연 이들의 말처럼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북한 특수군이 게릴라전을 주도한 폭동이 발생했던 것일까? 전두환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을까?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되자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는 12월 12일 하극상을 통해 군부를 장악한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국민들의 열망과는 반대로 전두환 일당이 점차 권력기반을 구축하자 1980년 5월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신군부가 배후에서 조종하던 '비상국무회의'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계엄포고 10호를 발표하였고 반발하는 광주지역 대학생들과 시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5월 18일 공수부대를 투입, 무고한 대학생과 시민들을 대검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때리며 무차별적 폭력진압을 시도했다.(전교사 작전상황일지, 5.18, 7 공수대 총검 진압).
당시 공수부대의 폭력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했는데, '국회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공수부대원들은 신문사에 난입해 도망 온 시민들과 신문사 직원들을 개머리판으로 내리쳐 바닥에 짓이기고 끌고 가기도 했고, 결혼한 부부가 탄 택시를 잡아 세워 신부의 옷을 찢고, 말리는 신랑을 집단으로 폭행하기도 했다. 체육대회에 참석한 의대생을 잡아 췌장과 비장이 파열될 정도로 폭행하기도 했으며, 청각장애인을 잡아 구타해 두개골과 눈이 터지고, 팔과 어깨, 엉덩이와 허벅지를 으깨어 사망에 이르게 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은 전남도청과 전남대학교에서 대치중인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 사격을 개시했고, 금남로의 여러 고층빌딩에 4인 1개 조로 올라가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국방부 과거사 진상위원회 조사 결과, 2007년). 지난 2009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29주년을 기념해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금 및 구속 피해자가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5,189명의 희생자가 확인되었다. 사망자의 연령을 살펴보면, 14세 이하가 8명, 15~19세가 36명, 20대가 73명, 30대가 26명, 40대가 9명, 50대가 6명, 60대가 4명 등이었다(5.18 기념재단).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국가적으로는 6차례나 조사가 이뤄졌다. 항쟁 직후 계엄사 발표, 1985년 국방부 재조사, 1988년 국회 청문회, 1995년 검찰 및 국방부 조사, 1996년~1997년 재판, 2007년 국방부과거사위원회 조사 등이다. 이 6차례 조사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정황이나 증거는 단 한 번도 발표된 바가 없다(5.18 기념재단).
신군부는 5·18 기간 동안
‘북 공작원 독침사건’을 조작하는 등
시민군을 북한과 연계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상황이었음.
그러나 신군부는 그 어떤 북한군의 침투는
물론 북한과의 연계 의혹을
밝혀내지 못하였음.
-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 보고서
당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했던 전두환은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사이에 광주, 전남에 간 사실이 없고, 광주지역 경찰력이 실종되어 보안사의 정보수집도 불가능했다"는 취지로 기술하며 5.18과의 관계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보안사령부는 당시에 광주 현지로 보안사 요원을 파견했고, 5월 19일 보안사 참모회의에서 광주에 대한 토의가 있은 뒤 보안사 기획조정처장인 최예섭 준장을 현지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밝혔다. 또한 지난 1996년 7월 5.18 사건 21차 공판에서 당시 전교사령관이었던 소준열은 전두환으로부터 "공수부대원들의 사기를 죽이지 말라"는 친필 메모를 받았다고 증언함으로써 전두환의 5.18 광주 개입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남겼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의 죄과를 물어 전두환은 지난 1995년 '내란죄 및 반란수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로부터 2년 뒤인 1997년 12월 22일 사면되었다. 최근 자신의 회고록에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사탄으로 묘사했다가 명예훼손으로 형사재판에 넘겨졌으나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이유로 출석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은 재판 출석일을 전후해 골프장에서 멀쩡히 골프를 즐겼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또 한 번 물의를 일으켰다.
지금도 전두환은 만 88세의 나이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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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매거진 '이 영화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는 영화의 내용과 의미를 충실하게 전함으로써 영화를 보았거나 혹은 보지 못한 이들에게 '읽는 영화'로서의 재미를 선사함과 동시에 그 영화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주는 사회적 의미를 되짚어보는 데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영화는 허구적 상상력의 집약체이지만, 그 허구는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상상력도 인간의 심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영화가 바라보고 있는 나름의 현실, 그리고 인간의 심리를 되짚어보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때로는 묵직한 울림을 주기도 하고, 흥미로운 통찰과 관점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영화를 읽으며, 사람과 세상을 알아가는 재미를 함께 누렸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