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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쌤 Dec 21. 2020

아이들이 먹방에 열광하는 이유

도대체 남 먹는 걸 왜 보는 거니?

*2020년 1월 격월간 교육잡지 민들레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그거 아니면 무슨 재미로 살아요     

16년 강사 생활에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이거 가르쳐주세요” “시험 몇 점 받았어요”가 아닌 “배고파요!”일 것이다. 내 얼굴에 치킨이나 떡볶이가 그려져 있는 것처럼 뭘 사달라는 말이 항상 인사보다 먼저다. 나는 과민한 대장 때문에 집이 아닌 곳에선 음식을 많이 먹지 않는 편이다. 다양한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도 별로 없어 어디 여행 가서도 맛집을 찾아다니지는 않는다. 그래서 맛집 앞에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그런 열정이 부럽기도 하다. 


2년 전 중학교 2, 3학년 학생들 네 명과 일본 오사카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여행 가기 전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 함께 계획을 세우자고 했더니 “저희는 어딜 가도 괜찮아요. 맛집만 가면 돼요” 한다.

“오코노미야키랑 타코야키랑 스시는 꼭 먹어야 해요!”

“저는 가자마자 일본 편의점 다 털 거예요!”

그럴 거면 굳이 일본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먹방 여행을 진심으로 즐겼다. 하루에도 세 번씩 편의점을 털고(?), 수시로 타코야키를 비롯한 주전부리를 사 먹고, 그러고도 꼬박꼬박 세 끼를 챙긴 다음, 커다란 비닐 가방을 사서 일본 간식을 보따리 장사처럼 챙겨 넣고서야 만족한 표정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식탐과 음식에 대한 숭배를 3박4일 동안 온전히 경험한 시간이었다. 

“먹는 게 그렇게 좋아?”

“당연하죠. 그거 아니면 무슨 재미로 살아요?”


아이들은 맛집을 탐방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사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돈이 없어 먹고 싶은 걸 참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비참하다고까지 한다.

먹방을 보는 아이들이 꽤 많다. 밴쯔, 쯔양, 입짧은햇님, 도로시 등 인기 있는 먹방 유튜버들의 이름을 줄줄 꾀는 아이들도 있다. 나는 먹방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그걸 왜 보느냐고 물었다. 

“대리만족이죠. 저는 못 먹는 음식을 남들이 먹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다이어트 때문에 많이 못 먹으니까, 대신 폭식하는 영상을 봐요.”

“인간이 그렇게 많은 음식을 먹는 게 신기하잖아요!”

“맞아. 그러면서 몸매는 또 엄청 좋잖아.”      



먹방과 음식에 대한 토론     

2018년, 먹방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규제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여론이 좋지 않아 실행되진 못했다. 그러나 지상파에서까지 홍수처럼 쏟아지는 먹방이 지겹기도 하고 왜 사람들이 이리도 먹는 것에 열광하는지 궁금해 수업에서 다뤄 보기로 했다. 주제는 크게 ‘먹방 규제 필요할까’와 ‘음식에도 윤리가 필요할까’로 정했고, 유튜브를 제일 많이 보는 중학교 2, 3학년 아이들과 함께했다.


먼저, 먹방 규제에 대한 찬반토론을 했는데, 아무도 찬성하려는 사람이 없어 내가 찬성, 나머지는 반대, 무려 1대6의 토론이 시작됐다.

“요즘 비만 인구가 늘고 있고 성인병에 걸리는 연령도 낮아지고 있으니까 폭식이나 탐식을 권장하는 먹방은 어느 정도 규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먹방을 보거나 찍는 건 개인의 자유인데 그걸 막는 건 인권침해잖아요.”

“근데, 국민 건강에 해로운 담배 피우는 장면 같은 건 규제하잖아.”

“담배만큼 먹방이 해로울까요? 오히려 먹방 덕분에 행복해지는 사람도 많잖아요.”

“먹방은 특히 어린이 청소년들이 많이 보는데, 어릴 때부터 잘못된 식습관을 갖게 만드는 거 아닐까? 미국이나 유럽 몇몇 국가에서는 탄산음료 자판기를 학교 내에 두지 못하게 한다거나 설탕세, 비만세를 기업에게 걷는다거나 하는 제도를 갖고 있어. 먹방 규제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근데 먹방을 봐라, 보지 마라 하는 건 국민을 너무 못 믿는 거 아닌가요? 우리도 판단을 할 줄 알아요. 저렇게 먹는 건 몸에 안 좋다, 저런 음식을 실제 먹으면 안 된다, 이렇게 다 생각한다고요.”

“실제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또 위험할 정도로 많이 먹는 유튜버가 있다는 건 조회 수 높이려고 더 자극적으로 만든다는 거잖아. 그럼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거 아냐?”

“돈 많이 벌고 싶어서 자극적인 방송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도 그 사람들 자유잖아요. 그리고 어디까지가 자극적인 방송이고, 무엇이 폭식인지 기준도 애매하고요.”


먹는 것은 생존 본능이므로, 나는 그 본능이 채워지고 난 이후에도 계속 먹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죄책감을 갖고 있다. 아마 청소년 시절 살이 쪄서 놀림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당시 그리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살이 비정상적으로 쪘고, 몸이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다.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자신감을 잃고 방황도 많이 해서 그런지 비만에 대한 걱정이 크다.


또 필요한 에너지 이상을 섭취하는 것은 환경적으로도 비윤리적 행동이라 생각한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으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동물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사람들과 동물들의 터전이 되어야 할 곳이 밭으로 개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식재료의 종류와 양을 줄여야 하지 않을까. 이런 주장의 뒷받침으로 아보카도처럼 환경을 파괴하는 음식, 푸아그라, 샥스핀처럼 동물을 학대해서 만드는 요리, 소, 돼지, 닭처럼 사육과정에서 동물권이 지켜지지 않고 환경도 파괴되는 예를 들었더니, 아이들은 그럼 고기를 먹지 말라는 거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럼 뭘 먹고 살라는 거냐, 동물들도 다른 동물을 먹지 않느냐, 단백질이 우리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 아느냐! 이마에 띠라도 맬 것처럼 달려드는 아이들의 기세에 밀려 “아니, 아예 먹지 말라는 게 아니고…” 하며 한발 물러섰다.     



먹기 위해 사나살기 위해 먹나     

물론 완전 채식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나도 그렇다. 머리로는 채식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번번이 육식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젓가락질을 하고 만다. 육식을 끊고자 여러 번 다짐을 하지만 실패의 연속이다. 그래도 조금씩 줄여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하자 여기저기서 말도 안 된다며 불만을 제기한다. 

“선생님처럼 생각하는 사람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나 혼자 그래 봤자 뭐 해요! 다들 고기 엄청 먹는데.”

“맞아요. 다들 맛있게 먹는데 나만 안 먹으면 손해잖아요.”

“채식하는 사람은 식물은 어떻게 먹어요? 식물도 생명인데?”

“세상 한 번 사는 거,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죽어야지 않겠어요!”     

보통 토론하면 서로 눈치 보며 말 안 하려는 아이들이 음식 얘기에는 눈을 까뒤집고 덤벼대는 통에 겁에 질릴 정도였다. 한 녀석이 이렇게 소리질렀다.

“쌤은 먹기 위해 살아요, 살기 위해 먹어요?”

“그러는 너는?”

“몰라요. 저도….”     


이렇게 싱겁게 우리의 토론은 끝났다. 사람은 먹기 위해 살까, 살기 위해 먹을까? 나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먹는 것과 관계없다. 식량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먹는 것 때문에 인간의 존엄을 버리지 않기 위해 인류는 부단한 노력을 해왔고, 일부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위 욕구를 충족한 상태에서 상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 이론이 기계처럼 작동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나는 식욕과 성욕이 주인공이 되는 사회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예술적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관계 형성의 욕구가 주인공이 되는 세상이 좀 더 행복한 세상일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음식에 관한 욕구가 커지는 것이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더 나은 욕구를 추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각자도생, 헬지옥, N포세대… 이런 신조어가 뜻하는 건 최소한의 욕구 충족조차 사치가 된 세상이 되었다는 뜻은 아닐까. 『90년생이 온다』의 저자 임홍택은 밀레니얼 세대들의 특징을 ‘간단함, 병맛, 솔직함’으로 정의한다. 어쩌면 우리는 복잡함과 진지함을 추구하면서 살기에는 너무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주 쉽고 싸게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콘텐츠가 우리의 삶을 채워주고, 위로해주게 된 건 아닐까.


수업이 끝난 후 나는 약간 막막해졌다. 수업을 준비할 때만 하더라도 나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배달음식과 편의점 음식을 너무도 좋아하는 아이들, 고기를 먹는 것이 삶의 유일한 즐거움인 양 말하는 아이들에게 그것이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확실한 가르침'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수업을 하는 동안 나는 나의 접근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먼저, 아이들이 가진 욕구를 존중하지 않았다. 또, 인간이 왜 먹는지, 또 왜 이런 형태로 먹는지에 대한 고찰도 없이 수업을 준비했다.     


 

본능을 바꾸는 세 가지 패턴     

그즈음 그레타 툰베리의 유엔기후행동정상회담 연설 영상을 보게 되었고 나는 가슴이 뛰었다. 익숙해진 삶의 형태를 바꾸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특히 그게 식생활이라면 더욱 그렇다. ‘식’은 생물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본능이다. 생존 본능이기도 하다. 본능, 오랜 관습과 문화, 익숙해진 삶의 패턴을 바꾸는 데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가치관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계기와 가치관을 지키기 위한 공부, 그리고 강력한 의지다. 나는 아이들에게 변화의 계기도 공부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의지만 강요하는 수업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중고등학생들과 음식에 관한 책을 간간이 읽고 이야기 나누고 있다. 음식의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식탁 위의 세계사』를 읽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음식들이 인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공부했다. 치킨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들과는 『대한민국치킨전』을 읽으면서 우리가 치킨의 민족이 된 이유에 관해 이야기했다. 음식 관련 책은 아니지만 그레타 툰베리에 관한 책도 읽었다. 과도한 육식이 왜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는지 심각하게 이야기 나누었다. 온실가스의 발생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사실 개인 차원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특히 청소년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본인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게 육식과 소비를 줄이는 것뿐이라는 건 아는데, 너무 불가능한 얘기처럼 들린다고 한다. 급식을 먹고 있고, 집에서 요리를 하는 것도 아니니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했다.


“그래, 그건 정말 맞는 얘기야. 다만, 예전처럼 고기를 먹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여기거나, 채식하는 걸 비웃거나 비난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지.”

“저희도 이제 안 그래요. 채식하는 게 얼마나 힘든 결단인지 알아요. 그리고 너무 대단하고요.”

“맞아요. 사실 그레타 툰베리 말이 맞잖아요. 10년 후면 우리가 대학 졸업할 나인데, 그때 환경이 엉망이 된다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 뭔가 하긴 해야 하잖아요.”

“근데, 너무 멀게만 느껴져요. 진짜 그렇게 될까 의심이 되기도 하고, 알면 알수록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하는 좌절감만 들고요.”


좌절감을 느끼는 게 마음 아프기도 하지만, 결국 앎이 삶 속에 파고들었기에, 예전처럼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넘게 수업을 하면서 음식이나 환경 이야기만 한 건 아니지만, 생각의 변화가 다채롭게 일어난 부분이기는 하다. 사실 행동의 변화는 나에게서 가장 크게 일어났다. 나는 점점 육식을 줄이고 있으며, 식단일기를 쓰고 있다. 내가 보여주지 않으면 아이들 말대로 결국 불가능한 이야기로 끝나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실천에 자극받은 아이들은 요즘 치킨 사 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또 고기 타령도 덜 하고, 채식주의자를 비웃는 발언도 하지 않는다.


      

먹는 일을 가르친다는 것     

나는 여전히 먹방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들이 먹방을 보는 것에 대해 처음처럼 마냥 부정적인 마음은 사라졌다. 먹방을 보는 심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궁금하다. 어떤 심리학자는 현대인들이 정신적 허기를 음식으로 채우고 싶은데, 건강이나 비용이 걱정되니 먹방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나친 경쟁에 지쳐 소확행을 추구하고자 하는 심리가 커지는데, 가장 싸고 쉽게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음식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회학자도 있다. 한 음식평론가는 먹방은 타인의 쾌락을 내 쾌락으로 삼는 포르노와 같다고 한다. 모두 맞는 말 같은데, 아이들에게 적용해보면 글쎄,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 심각한 이유가 아니라 “다들 재미있다고 하니 나도 본다”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이야기하면서 어렴풋이 마음에 그려지는 이유는 ‘무엇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즐겨 보는 유튜브 콘텐츠는 먹방만이 아니다. 슬라임을 만지는 영상, 외출 준비를 하는 영상, 화장하는 영상, 공부하는 영상 등. 그 모든 영상의 공통점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구하지 않기에 결과를 만들 필요가 없다.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고 뭔가 깨달을 필요도 없다. 애써 집중할 필요도 없고 그냥, 틈이 날 때 잠깐 보고 언제든 꺼버릴 수 있다. 단순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이들에게는 간절히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학습노동에 지친 아이들, 또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지친 아이들, 먹을 때마다 빨리 먹으라고 채근 받는 아이들에게 먹방은 그나마 휴식의 시간이 아닐까. 


비단 아이들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다. 나는 독서수업과 독서모임을 여러 개 진행한다. 한 달 평균 100여 명의 사람들을 만나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읽고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복잡하고 의미 있는 사고와 대화의 시간이 나를 성장하게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간에는 아무 생각 없이 TV 예능 프로그램이나 웹툰을 보며 낄낄거린다. 그 시간이 나에겐 진정한 휴식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지만, 생각을 멈추는 시간이 또 다른 생각을 하는 데 양분이 된다. 먹방 포르노라고, 단순한 쾌락에 집착한다고 비난하거나 걱정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복잡하고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할 여유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런 의미도 쓸모도 없는 것에 시간을 쓸 수 있는 여유도 주어야 한다. 단순함과 복잡함, 무거움과 가벼움, 두 가지 모두 삶에는 중요한 가치다.


독일 철학자 포이어바흐는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단지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아이들과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먹는 것’이 아닌 ‘인간’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음식이 인간 존재 방식을 규정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면, 음식을 통해 인간을 알아가는 것 또한 나쁜 접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또 수업을 준비한다. 앞으로 『10대와 통하는 음식 이야기』, 『아무튼, 비건』, 『먹는 인간』을 함께 읽어볼 예정이다. 먹는 일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무슨 음식을 어떤 방식으로 함께 먹을지’부터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이번 수업에는 맛있고 윤리적인 간식도 준비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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