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쌤 Jan 23. 2021

공부 열심히 해서 나처럼 살지 말라는 말

아이들에게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해도 될까

초등 5, 6학년 아이들과 새해를 맞이해서 소원 쓰기를 해 보았다. 그냥 쓰면 재미없으니까 어린이 때부터 70대까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나의 소원이 어떻게 달라질 것 같은지 써 보라고 했다. 대다수가 청소년 때는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20대는 취업, 30대는 성공을 소원했다. 역시 한국인이군.


특이하게 느껴졌던 게 40대부터의 소원이다. 많은 아이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편하게 놀고 싶다는 말을 했다. 40대에 벌써 은퇴라니! 어떤 통계 조사를 보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고, 또 많이 쓰는 세대가 40대라고 한다. 40대에 은퇴하려면 빈 상가가 하나도 없는 건물 하나쯤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텐데. 어떤 친구들은 20대부터 놀고먹고 싶다고 했다. 직업을 갖지 않고, 노동을 하지 않아도 통장에 돈이 따박따박 들어오는 삶을 살고 싶다고.


"야, 그건 건물주가 되거나 주식 부자거나 그래야 가능할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일하는 게 왜 싫어?"

"힘들잖아요. 놀고먹고 싶어요."

"일하지 않고 먹고사는 건 그리 바람직한 거 같진 않은데. 그래서 불로소득에 대해서는 소득세를 많이 내잖아. 상속세처럼."

"근데 부모가 나 주려고 돈을 열심히 벌었는데 그걸 왜 나라에 바쳐야 돼요?"

"세금 내는 건 바치는 게 아니고. 어차피 국가와 국민을 위해 쓰는 거니까 누구 한 사람이 가져가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너무 많이 가져가잖아요. 내 돈인데."

"그건 네 돈이 아니고 부모님 돈 아닐까?"

"부모님 돈이 제 돈이죠."

"그 돈을 버는데 네가 아무 기여를 안 했는데 왜 네 돈이지?"

"그럼 선생님은 일하지 않고 버는 돈은 다 나쁘다는 거예요? 건물주도 나쁜 사람인가요?"

"나쁘다는 게 아니고 그냥 일하지 않고 버는 돈이라는 거야."

"그 건물을 사기 위해 일을 해서 돈을 벌었을 거잖아요."

"그럴 수도 있는데, 아닐 수도 있어. 상속 받거나 은행에서 돈을 빌려 살 수도 있잖아. 건물을 무슨 돈으로 샀느냐를 말하는 게 아니야. 건물을 가지고 월세를 받는 것은 불로소득으로 구분해."

"어쨌든 일 안 하고 돈 버는 게 최고 좋은 거잖아요."


언젠가부터 아이들에게 "일 안 하고 놀고먹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 의아해진다. 일도 안 해봤으면서 일하는 게 힘들다고만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얘들이 딱히 뉴스를 많이 보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닌데 왜 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걸까? 물어보니 부모님들이 늘 일 그만두고 싶다, 일하기 싫다는 말을 많이 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이 무조건 힘들기만 한 게 아니야. 돈을 번다는 게 가장 큰 목적이긴 하지만, 다른 이유도 많아. 부모님들이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막상 일을 관두라고 하면 싫다고 하실 걸."

아이들은 전혀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 사회에 어떤 쓸모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나,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다는 목적도 일을 하는 이유 중에 하나잖아."

"꼭 쓸모가 돼야 해요? 아무것도 이루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잖아요."

"맞아요. 그냥 나만 좋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 아이들의 부모님이 장시간 노동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분들이 아니고, 대부분 전문직종이나 자영업을 하시는, 깨 놓고 말해 경제적으로  중산층 이상의 집 아이들이기에 더 그랬다. 더 말을 한다는 건 결국 어른이라는 힘을 내세워 압박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냥 선생님 생각이 그렇다는 거야.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르니까."하고 슬그머니 대화를 종료했다.


이런 대화를 꽤 자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 힘들더라도 공부 열심히 해야 나중에 편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그럼 나는 "지금 편하게 살고 나중에 고생하면 안 돼?"하고 묻는다. 그럼 아주 당황하는 경우가 많은데, 별다른 이유를 말하지는 않지만, 무조건 "그럼 안 된다."라고 대답한다. 이런 대화를 나눌 때 내 앞에 있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다. 그래서 대화가 매우 민감해진다. 나와 부모의 생각이 지나치게 반대될 경우, 또는 내가 부모의 의견을 나쁘다고 비판한다고 느낄 경우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옳든 그르든 무조건 부모님 편이기 때문이다.


그 수업이 끝나고 다음 수업에서도, 또 그다음 수업에서도 똑같은 대화가 오가게 되었다. 힘겨워진 나는 "야! 그럼 너네 주변에는 일하는 거 좋다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냐!"하고 외쳐 버렸는데, 모두들 손가락으로 조용히 나를 가리켰다. 나도 모르게

"아니거등! 나도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 많거등!"하고 말해버렸....

"으..응? 쌤 뭐라고요?"

"응, 내가 잘못했어. 피곤해서 헛소리가 나오네. 데헷:P."




이날의 수업이 끝나고 주말을 기다렸다. 주말에는 중학생들이 오는데, 나는 주중에 초등학생들과 있었던 다툼을 꼭 중학생들한테 일러준 다음 초등학생들은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 때문이다. 그럼 중학생들은 "나 때는 말이에요~." 하면서 초등학생들의 심리 상태를 분석해주면서 현자와 같은 가르침을 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또는 "어린애들이랑 수업한다고 쌤이 고생이 많네요." 하면서 내 편을 들어주기도 한다.


"야, 애들은 왜 일이 힘들다고만 생각할까? 부모님들은 왜 또 일하기 싫단 말을 애들한테 하는 걸까?"

"아 그건 말이죠. 보통 부모님들이 '나도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데 너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어'하고 협박할 때 쓰는 말이에요."

아! 그랬구나! "내가 힘들게 돈 벌어서 학원 보내줬는데 점수가 왜 이 모양이야!" 같은 거였구나....


"그럼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이 어때."

"괜히 주눅 들고 그렇죠. 부모님이 힘들게 일하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고...."

"그런 말 계속 들으면 일이 힘들다고만 생각하지 않을까? 일은 누구나 해야 하는 거고, 하루의 대부분을 일하는 데 쓸 거고, 사명감을 갖고 일해야 하는데, 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건 별로 안 좋은 거 같아."

"그건 그렇죠. 일하면서 느낀 보람이나 회사에 대한 애정 같은 걸 많이 들으면 그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들 것 같긴 해요."


중고등학생들과 수업할 때는 종종 진로에 대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오는 말이 "좋아하는 일 하는 게 나은지, 잘하는 일을 하는 게 나은지"이다. 대부분 아이들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야 오래 행복하게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이 좀 다른데, 둘 중 골라야 한다면 '잘하는 일'을 고르고 싶다. 취미를 고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잘하는 일이어야 인정받고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 일을 이어갈 수 있는 힘과 동료가 생긴다. 좋아하지만 서툰 일은 취미로만 즐기는 게 훨씬 낫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싫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둘 중에서 답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사회적으로 '쓸모'가 되는 일을 고르겠다. 나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내가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부심과 자존감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 쓸모 있는 일과 쓸모없는 일이 따로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는 가가 쓸모를 좌우한다.



아이들은 아주 쉽게 "힘들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많이 한다. 힘들게 사는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육체노동을 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으면 서글프다. 세상에 육체노동이 아닌 노동이 있는지 물으면 "의사, 교사, 판사"등의 직업을 말한다. 그럼 그들은 무엇으로 노동을 하냐고 물으니 "머리를 쓰는 일"이라고 한다. 머리는 육체가 아닌가 물으면 대답이 없다. 뇌도 육체의 일부인데, 어떤 노동은 육체노동, 어떤 노동은 머리 노동(지식 노동)이라 불리는 게 옳지 않게 느껴진다. 그럼 뭐라고 물러야 하냐고 아이들이 묻길래, 꼭 무엇이라 불러야 하느냐고 그냥 다 일, 노동이라고 부르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그럼 열심히 공부해서 직업을 얻은 사람이랑, 그렇지 않은 사람이랑 다 똑같이 취급하는 거잖아요!"


아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인성 교육이  되었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힘들게 공부한 자신의 삶을 보상받고 싶어  뿐이다. 그게 공정이라고 믿는다.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딱히 힘들게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도, 그냥  배워야 하는 것들을 배우는  마저도 치를 떨며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대가를 받지 않는 배움이나 공부를 거부하기에 공부 자체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뇌도 몸이고 정신작용은 뇌에서 나오는 것이니 모든 노동이 육체를 쓰는 노동이되, 숙련 노동과 비숙련 노동이란 말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오랜 시간과 배움이 필요한 노동도 있고, 그렇지 않은 노동도 있다고. 예를 들어 미용사가 되기 위해서 적어도 2-3년의 배움과 또 그만큼의 연습 기간이 더 필요하고,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도 비슷한 기간이 필요하니 둘 다 숙련 노동이라 할 수 있고,  서빙이나 판매원 같은 경우 단기간 일을 배워 할 수 있으니 비숙련 노동이라 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쌤, 그런데 서빙하시는 분들 중에서 막 접시를 10개씩 옮기고, 머리에 쟁반을 여러 개 쌓아 옮기는 분도 계시던데 그건 단숨에 배울 수 없잖아요. 그럼 그것도 숙련 노동 아니에요?"

"나도 그거 봤어. 엄청 신기하더라."

"멋있다. 나도 해 보고 싶다."

아이들은 '생활의 달인'에서 봤을 법한 사람들의 얘기를 웅성웅성 나누기 시작했다.

"어 그렇네. 그럼 세상에 숙련 노동 아닌 게 없네."

"맞아요. 오래 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 숙련 노동자가 되겠어요."


나는 아이들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경이로움을 느끼길 바란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오랫동안 일에 애착을 갖고 하는 사람들, 새로운 일을 창조하는 사람들, 소박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 사명감을 갖고 세상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생계를 위해 치열하게 일하는 사람들 모두 박수받고 존경받았으면 좋겠다. "서른에 주식으로 부자가 됐다"거나 "마흔에 부동산 부자 돼서 퇴직하기" 같은 말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꾸준히 천천히 삶을 일구는 사람들이 존경받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아이들이 소박한 꿈을 꾸고 소박한 삶을 살길 바라고, 그래서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큰 거창한 미래를 기대하며 현실을 희생하는 고통을 겪지 않고, 또 대단치 않은 능력을 가진 자신을 미워하지 않길 바란다.


물론 삶이 팍팍하고 노동이 고되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개인의 탓이 아님을 더욱 잘 안다. 그래도 모든 노동은 귀하고 가치가 있기에, 일하는 사람의 삶은 틀린 것이 아니기에 부모님 또는 주요 양육자들과 선생님들이 일에 대해 조금은 긍정적인 말들을 아이들에게 많이 해 주셨으면 좋겠다. 어떤 일을 하고 있든 간에 내가 이 일을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어떤 기쁨을 느끼는지, 사회적으로 어떤 쓸모가 있는지를 당당하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너희는 공부 열심히 해서 나처럼 살지 마라"는 말은 내 세대에서 끝났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들이 먹방에 열광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