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냥독선생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나아가는 길

『나는 숨지 않는다』, 박희정, 유해정, 이호연, 인권기록센터 사이 씀,

by 고양이쌤

*2020년 3월 격월간 교육잡지 <민들레>에 기고한 글입니다.



경험하지 않으면 모른다?

“제가 봉사활동하면서 한부모가정 아이들을 만나는데요. 아빠 없는 애들은 괜찮은데, 엄마 없는 애들은 성격이 삐뚤어지고, 엄마 원망을 많이 하더라고요. 엄마가 주는 사랑하고, 아빠가 주는 사랑은 완전 다른 거예요. 애들은 역시 엄마가 키워야 해요.”

몇 해 전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수 클리볼드, 반비)를 읽고 독서모임을 하던 중 들은 말이다. 엄마가 아이의 양육과 교육을 전담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라서 아빠 없는 아이보다 엄마 없는 아이가 상실감이 더 클 것이라고 추측하는 건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그래서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분의 말에 반박하자, 돌아온 말은 “선생님은 애 안 키워봐서 그래요”였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하며 비출산을 결심했다. 아이를 낳으면 나와 남편의 삶이 어떻게 얼마나 변할지, 우리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인간인지, 이 세상은 아이가 행복하게 살 만한 곳인지… 책도 읽고, 주변 사람들과 상담도 하며 수년을 고민하다 내린 이 결정 때문에 결혼 10년 차인 지금도 가족과 갈등을 겪고 있으며, 주변의 비난에 시달린다. 햇수로 17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쳐왔다. 그렇지만 여전히 결정적인 순간에는 ‘선생’이 아니라 ‘애 없는 여자’로 평가받는다. 어떤 부모는 내게 아이를 맡길 때 이렇게 말한다. “아이가 없으니 우리 애를 더 잘 봐주시겠죠.” 그러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아이가 없어서 잘 모르시나 봐요” 한다. 이 둘의 간극이 너무도 커서 혼란스러울 때 나는 자녀가 있는 지인에게 전화해 한탄하듯 묻는다. “아이가 없으면 부모의 마음도 아이의 마음도 이해할 수 없는 건가요? 나도 부모가 있고 한때는 아이였는데도 그럴까요?”


경험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해불가능의 세계에서 서로 벽을 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똑같은 경험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에 놓인 벽에 금이 가게 하려면 일단 귀를 대고 벽 너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존중하는 척, 공감하는 척하며 듣는 게 아니라, ‘제대로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나는 숨지 않는다』를 펴낸 박희정, 유해정, 이호연 인권기록활동가는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이름이 지워졌던 11명의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한다. 단순히 듣고만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그들은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문을 여는 순간(224쪽)’을.


“묘현이 대화 중 크고 장엄하게 눈을 내리감는 순간이 있다. 그때 어쩐지 나는 심장이 찌르르했는데, 그것이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문을 여는 순간의 느낌이라는 것을, 글을 쓰면서야 깨달았다.” _224쪽



이름 붙이기

한부모가정의 여성가장, 탈북여성, 홈리스여성, 장애여성, 조현병을 앓고 있는 여성, 탈가정 청소년, 스쿨미투의 당사자 청소년들. 사실 나는 이들을 정확히 어떤 언어로 호칭하는 것이 옳은지 매우 고민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1장에서 한부모 여성가장인 유지윤 씨를 인터뷰한 유해정 활동가는 ‘이혼여성, 한부모가족이라 적고 몇 번이나 쓰고 지우길 반복했다(50쪽)’고 한다. 그 단어에 달라붙은 사회적 편견과 혐오의 흔적이 불편해 다른 단어를 선택하고 싶어도 바꿔 쓸 대안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 앞에 이 두 단어가 붙었을 때 쉽게 떠올리는 삶의 전형성 때문이기도 했다. 각 개인과 가족이 빚어내는 고유한 삶의 질감과 색채는 사라진 채 불쌍하고, 빈곤하며, 납작하게만 상상되고 재현되는 게 못내 찜찜했다.” _52쪽


한 사람의 삶에서 맥락을 삭제한 채 한 단어로 이름 붙이는 순간 그는 나에게로 와 대상화된다. 집 주변을 산책하던 중 전봇대에 붙어 있는 ‘참한 북한 여성과 결혼하세요’란 광고지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실제 북한 여성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빈곤한 나의 상상력 속에서조차 ‘북한 여성’이 어째서 ‘참한’가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해 국경을 넘고 넘어 한국에 도착한 여성들이 한국의 남성들에게는 유독 고분고분하고 참한 여성으로 대상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한국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만 세뇌됐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한국 사람들도 남북문제에 관해서는 세뇌됐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스스로 생각해보기도 전에 미디어를 통해서 정부가 원하는 대로 이미 받아들여버린 거예요(93쪽)”라고 말하는 탈북여성 제시 킴의 말이 날카롭다.


그러나 ‘이름 붙이기’는 그 존재의 또 다른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하기도 한다. ‘노숙인’을 ‘홈리스’라고 바꾸는 것으로 단지 길에서 사는 사람들만이 아닌 다양한 주거 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다. ‘가출’을 ‘탈가정’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으로 단순히 집을 나온 게 아니라 가족 구성원으로부터의 탈출 또는 독립을 선언한 청소년 당사자의 시각을 반영할 수도 있다. ‘언어는 인식의 반영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인식을 구성(176쪽)’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언어를 부수고 재조합해보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문법만 따라갈 때 타인의 삶을 쉽게 재단하고, 내 주변에서 탈락시키게 된다. 수년 전, 장애인을 ‘장애우’로 부르자고 하다가 다시 ‘장애인’으로 칭하는 게 더 옳다는 가치 판단을 내리기까지의 사회적인 혼란과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 시간들은 ‘장애인들을 어떤 존재로 볼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토대가 되었다.



내 삶의 서사권은 내게 있다

11명의 여성들은 한 가지 정체성으로 규정당했을 때, ‘나’로 살 수 없었다고 한다. 유지윤은 이혼 전에는 아내나 엄마, 며느리로, 이혼 후에는 빈곤한 이혼여성이자 한부모가족으로 규정당하면서 더욱 움츠러들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배려와 지원보다 자신을 ‘존엄한 세계를 가진 한 사람으로 편견 없이 바라봐주고 얼굴을 마주 대해주는 것(20쪽)’이었다. 살면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경험하고 느끼며 써내려간 삶의 서사가 존엄을 만든다.


그러나 세상은 한 사람이 고유의 서사를 펼치며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기보다는 전형성의 틀 안에 구겨 넣으려 한다. 그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면 아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소수자의 삶은 이해나 공감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영역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쉽게 이분법의 대상이 된다. 장애 여성이 아이를 낳으면 “장애인인데 대단하다” 또는 “아이한테 미안하지도 않나” 하는 말을 듣고, 청소년이 스쿨미투 운동을 하면 “기특하다” 아니면 “싸가지 없다” 둘 중 하나의 평가를 받는다. 극단과 극단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지워지고 가려진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을수록 상상력의 범위는 협소해지고, 그 협소한 상상력 위에서 두려움과 혐오가 자란다.


대표적인 것이 조현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혐오다. 경남 진주의 아파트 방화 살인 사건 이후 조현병은 잠재적 범죄자를 가리키는 말처럼 쓰인다. 정신질환이 없는 사람의 범죄율이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의 범죄율보다 훨씬 높다는 통계는 아무 소용없다.

“혐오는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지 않고 힘을 갖지 못하는 존재에게로 흐른다.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할 필요도 없는 존재에게 브레이크 없이 화를 쏟아내는 것이다.” _252쪽


귀를 막고 벽을 칠수록 공포는 더욱 커진다. 이해불가능성이 만들어내는 편견과 혐오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는 또 누군가를 피해자나 소수자로 만든다. 알 수 없고 알기 싫은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욱 서로를 불신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내가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것은 절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누군가가 소수자성을 갖게 되는 것 또한 그들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박희정 활동가가 묘현과 나눈 마지막 인터뷰는 아주 사적인 문제의 원인이 매우 사회적인 일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묘현에게 처음 조현병 증상이 나타나기 직전 그녀는 성폭행을 당했다. 힘들어하는 묘현에게 엄마는 쉬면 괜찮을 거라고만 했다. 정신과를 터부시하는 사회풍조가 없었다면 어쩌면 시기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조현병이 발현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또 성폭행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사회가 아니었다면 묘현이 자기 탓을 하며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다. 묘현은 어린 시절 아빠의 폭력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했는데, 아빠 또한 군사독재시절 고문을 받았던 피해자다. 아빠의 폭력은 단지 개인의 성향 때문이었을까. 폭력적인 사회와 그것을 용인하는 문화가 아빠로 하여금 딸에게 폭력을 가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고, 개인에게 극복의 과제를 다 짊어지우기에는 사회적 맥락이 너무도 크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들의 목소리가 더욱 소중하게 와 닿았다.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이를 통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삶으로 보여주겠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1명의 인터뷰이 모두가 ‘삶으로 보여주겠다’는 태도를 가졌다는 점이다. 굳이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삶 자체가 다음 사람을 위한 분투의 현장이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갈 때마다 장애인들을 배려하지 않은 시설과 검진 장비 때문에 마치 ‘정육점의 고기 덩어리’가 된 느낌을 받는다는 임경미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병원을 오가겠다고 한다. “아이를 낳아 키우며 생활하며 병원에 오가는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넘어 후배 장애여성들에게도 의미 있다(126쪽)”고 자신을 북돋는다. 조현증을 안고 살아가는 묘현도 마찬가지다. 직장생활이 힘들어도 열심히 노력하는 이유는 조현증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싶어서다. 모든 정신질환자를 의지박약인 사람 아니면 범죄자로 규정하는 사회적 편견과 조용히 싸우고 있는 것이다. 70대 홈리스 여성 김복자는 자신의 식성을 잘 아는 단골 식당만 가고, 공짜로 얻어 마시는 커피에도 블랙에 설탕 한 숟갈만 넣으라 요구한다. 그의 태도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 같은 사람에게도 ‘개인적 취향’을 존중받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 책의 부제처럼 ‘세상에 가려지기보다 세상을 바꾸기’를 선택한다. 가만히 있지 않고 ‘설치고 말하고 연대’한다. 관계의 그물망이 촘촘해질수록 그들은 어쩐지 더 ‘나다움’을 깨닫게 된다. 가장 나다울 때 가장 존엄할 수 있음을 삶 자체로 보여주는 그들의 태도에 용기를 얻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삶이 늘 전장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우리 사회에는 착한 사람이 51퍼센트라는 유지윤의 말을 나도 믿는다. 그러나 선의는 일시적이다. 장애여성인 임경미를 고용했던 회사는 네 계단 위에 있는 화장실을 다닐 수 없었던 그녀를 결국 해고했다. 선의로 화장실까지 휠체어를 들어 옮겨줄 수 있지만, 그 선의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 또 당사자는 부담 없이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선의에 기대지 않고도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온전한 공감의 불가능성과 그 가능성

9년간 독서모임을 운영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온전한 공감의 불가능성’이다. 공감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더욱 중요한 인간의 능력은 공감이라고 외치지만, 타인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관심 갖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오히려 잘못된 공감이 상처를 줄 때도 많다. “나도 겪어봐서 아는데”란 말을 하는 사람을 꼰대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점에서 청소년 페미니스트 윤의 말은 곱씹어 생각해봐야 할 주제다.

“공감과 이해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의 상황에 대해서 온전하게 공감할 수는 없을 거예요. 혹시 경험이 겹치면 공감의 가능성이 넓어지겠지만 모두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거쳐 왔던 세상이 다르고 경험도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의 얘기를 들을 때 자신의 경험의 틀로 보려고 하죠. 그건 자기 삶에 비춰서 보는 거지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건 아니에요. 근데 이해는 충분히 가능해요. 이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 감정과 생각을 가질 수 있겠구나. 적어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났고 누군가는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사는지를 이해하면 우리가 왜 말하는지 납득할 수 있고 진짜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_302쪽


지난여름, 나는 어떤 기자에게 메일을 받았다. “아이 없이 살기를 선택한 여성들은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그들의 삶 전반에 대해 조금 더 넓고 깊게 듣고 싶다”며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 인터뷰 날짜를 잡은 후 내가 왜 비출산을 선택했는지, 그 선택이 옳은 것인지, 진정 만족하고 있는지… 온갖 질문과 대답이 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솔직한 생각을 말했을 때 비난받지 않을까 불안했다. 이런 인터뷰가 내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도 걱정되었다.


그런데 인터뷰 당일 여러 질문을 받으면서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고, 오히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을 수 있었다. 기자의 태도 때문이다. 지금껏 내게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물어온 사람 중 누구도 내 대답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걱정하거나 비난하거나, 당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어왔기 때문에 내 대답 또한 지나치게 공격적이었고, 대부분은 거짓으로 대충 애둘러 답했다. 그런데 그분은 진정 나라는 존재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이 느껴졌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나는 이 인터뷰를 통해서 ‘제대로 듣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서로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윤의 말처럼 우리는 온전히 공감하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섣불리 공감한다고 말하기 전에 다른 이들의 삶을 궁금해 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다정하게 질문을 던지자. 그럴 때 그 존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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