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냥독선생

절망도 혁명도, 밑바닥에서부터

『아이들의 계급투쟁』, 브래디 미카코 씀, 사계절, 2019

by 고양이쌤

*2020년 5월 격월간 교육잡지 <민들레>에 기고한 글입니다.



최악의 1퍼센트 사람들이 다니는 탁아소

가난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기억 속 최초의 집은 부엌과 연결된 단칸방이었는데 아홉 살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단칸방 여섯 개가 일렬로 늘어선 구조였고 공동으로 쓰는 재래식 화장실이 두 칸 있었다. 한 칸은 유독 더럽고 쥐가 자주 나와 다른 칸만 가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이라 그런지 불행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이웃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살았고, 동네에 또래 친구들도 많아 오히려 그 시절을 생각하면 흐뭇해진다. 대문을 열고 나가면 2층 양옥집들이 많았는데, 그 집들 구조도 우리와 비슷했다. 2층에는 주인집, 1층에는 셋방 여러 가구가 붙어 사는 구조.


부모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나처럼 아빠가 다른 지역에 돈 벌러 가서 엄마하고만 사는 아이들도 있었고, 선생님도 있었고, 장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맞은 편 주택 주인은 장난감 공장 사장이었는데, 때때로 불량이 난 장난감들을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그 집 아이들은 꽤 부자인 티를 내고 다녔지만, 단지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놀이에서 주도권을 잡지는 못했다. 오히려 성격 괄괄한 언니와 내가 늘 골목대장이었다. 누구도 우리를 가난하다고 무시하지 않았다. 가난하든 그렇지 않든 섞여 살았고 가난은 내 흠이 될 수 없었다.


『아이들의 계급투쟁』의 저자 브래디 미카코가 경험한 영국 하층 계급의 삶을 보며 내가 기억하는 가난이 실은 가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가난을 고통이 아닌 한때의 낭만으로 인식하고 있을 때, 브래디 미카코는 구체적인 가난의 현장에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는 펑크록밴드 섹스 피스톨즈에 빠져 영국으로 떠났다가 그곳에 정착해 20년을 산 일본 여성이다. 2008년, “우리 센터는 평균 수입, 실업률, 질병률이 전국에서 최악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습니다. 우리는 긴급한 상황에 처한 가정, 실직 가정, 저소득 가정의 아이들을 무료로 맡길 수 있는 부설 탁아소를 운영합니다. 이런 아이들과 함께 당신도 일해보지 않겠습니까.”라는 구인광고를 보고 탁아소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보육사 자격증을 따고 이후 8년간 공공 탁아소와 민간 어린이집에서 근무하게 된다.


4년 동안 탁아소에서 일한 경험을 정리한 이 책은 특이하게 시간 순서를 바꾸어 서술한다. 저자는 2008년에서 2010년까지 노동당 집권기의 탁아소를 ‘저변탁아소’, 2015년에서 2016년까지 보수당 집권기의 탁아소를 ‘긴축탁아소’라고 명명한다. ‘저변’은 말 그대로 밑바닥이란 의미로 영국의 최하층민 또는 이주민들을 위한 탁아소라는 성격을 드러내는 이름이다. ‘긴축’은 “브로큰 브리튼!Broken Britain”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집권한 보수당이 복지와 교육 분야의 대대적인 긴축정책을 실시하는 바람에 더는 내려갈 곳 없는 밑바닥 사람들이 탁아소마저 이용하기 어려워진 시기를 의미한다. 저자는 ‘긴축’의 시기를 1부에, ‘저변’의 시기를 2부에 배치한다. 저변탁아소 시절도 어려웠지만, 긴축탁아소는 어려운 정도를 넘어서서 마치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간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사정이 나빠졌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저자의 의도대로 1부의 긴축 시대의 탁아소 이야기를 다 읽고 2부의 저변 시대의 탁아소 이야기를 읽으면 저변 시절이 차라리 아름답게 느껴진다. 저변 시절 탁아소에도 온갖 어려운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적어도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정체성, 재능, 목적이 다양한 자원봉사자들이 청소, 교육, 놀이, 요리 등 각자가 가진 최선을 서로 나누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학습장애나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도 다른 봉사자의 도움과 관찰 하에 아이 돌보는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가 있더라도 서로 부딪히고 어울려야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철학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긴축 탁아소 시절에는 더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배고픔조차 해결하기 힘들어진 사람들은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가 없었고 더는 섞이지 않으려 했다. ‘해리와 분열(213쪽)’이 저변과 긴축 시대의 가장 큰 차이였고, 그 간격은 너무나 아득해졌다. 물론 상대적으로 저변 시절이 낫게 느껴질 뿐, 가난과 폭력, 소통 단절 속에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저자는 저변 시절을 “썩어 문드러진 세계에는 썩었지만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회상한다.



가난 속에 분리되는 사람들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기침은 참을 수 없고, 사랑은 표정으로 알 수 있다면 가난은 무엇으로 존재를 드러낼까? 한국에서는 주거 형태가 아닐까 한다. 내 책방은 빌라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지역에 있다. 처음 이곳에 자리 잡았을 때, 위치 때문에 아이들 보내기가 꺼려진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2분 거리에 초등학교 두 개가 있고, 길만 건너면 아파트가 즐비한 곳인데, 불과 몇 걸음 차이로 이곳은 우범지대처럼 취급될 때가 있다. 처음에는 왜 그런 불안을 가지는지 알 수 없었는데, 아이들을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로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빌라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잖아요.”

“주택에는 도둑이 많이 든대요.”

“원룸이나 투룸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아서 위험하대요.”


아이들의 머릿속에 ‘빌라=가난=범죄’라는 공식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말에 내포된 편견과 혐오는 이미 마음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다행인지 몰라도 주거 형태는 원한다면 감출 수도 있다. 영국에서 가난이 드러나는 형태는 감출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폭력적이다. 서로 ‘인사’만 나누어도 상대의 계급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차림새보다 출신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영어 발음이었다. 어떤 지역에서 태어나 자라든 사립학교에서 교육받은 중산층이나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은 BBC 아나운서처럼 명료한 발음을 한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의 발음에는 지역 색이 강한 악센트가 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각 단어의 마지막 음을 대충 발음한다. 게다가 말하는 속도까지 빠르기 때문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20쪽)


언어가 계급을 드러낸다면 숨만 쉬어도 내 가난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언어습관은 어린 시절 형성되어 바뀌기 어려운 것인 만큼 부모를 비롯한 양육자의 영향이 지대하다. 세대를 이어 언어습관과 함께 계급과 가난도 물려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비극적으로 다가왔다. 언어의 차이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가난한 아이들은 발달 속도 또한 더디다는 것이다. 저자는 저변탁아소 시기를 거친 후 민간 어린이집에서 2년을 일하는데 그때 중상층 부모를 둔 어린이들과 저변탁아소 아이들이 신체와 지능 발달 면에서 모두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연하게도 중상층 부모를 둔 아이는 하층계급 아이보다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어휘를 구사했으며, 숫자도 셀 줄 알았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런 겉으로 보이는 학습 능력이 아니라 아이들의 손끝이 야무지다는 점이었다. (…) 어린이집의 3세 아동은 저변탁아소의 3세 아동이 절대로 접을 수 없는 형태로 솜씨 좋게 종이를 접을 수 있다.”(36쪽)


정서발달 또한 마찬가지다. 부모가 알코올이나 약물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고, 이에 따른 가정폭력에 노출되거나 방치되는 아이들은 정서적 문제를 겪는다.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또는 사람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해 아예 소통을 거부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중산층 부모는 물론, 아이의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층계급의 부모가 저변탁아소를 피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자신의 아이가 하층계급의 속성에 젖어들게 될까 두려워서다.


저변탁아소부터 시작된 분리는 초등학교로 진학하면 더욱 공고해진다. 중상층 사람들이 명문 사립학교와 평판이 좋은 공립학교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 그 근처로 이사를 하고, 그러면 그 주변의 부동산 가격이 올라 결과적으로 그 지역에 살 수 없게 된 하층민은 집세가 싼 지역에 몰린다. 점차 부자와 빈자의 거주 지역은 분리되고 계급이 다른 아이들은 평생 서로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한 채 살게 된다. 중상층 사람들이나 하급계층 모두 서로의 삶을 미디어에서나 볼 수 있는 한정된 이미지로 각인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계층 분리를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한다. 분리는 혐오를 강화하고, 강화된 혐오는 ‘소셜 아파르트헤이트’를 더욱 촉진시켜 ‘서로 만나는 접점이 사라진 평행우주에서 살아가는 형편’(36쪽)이 되었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는 유독 재벌이 자주 등장한다. 평생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들은 내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돈을 벌고 사랑을 하고 싸움을 벌이고 사람을 괴롭히고 타락한다. 그런 그들을 보며 “역시 돈 있다고 다 행복한 건 아냐. 이룰 걸 다 이룬 부자들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타락하게 되어 있어”라고 마음대로 생각해버리곤 한다.


이와 똑같은 착각과 오해가 중상층과 하층계급 사이에도 존재한다. 중상층은 하층계급을 “다른 사람 세금으로 생활하는 주제에 액정 TV를 갖고 있고, 푸드뱅크를 이용하는 주제에 맥주를 사는”(44쪽) 도덕적으로 타락한 계층 취급한다. 하층계급에게 중상층들은 운이 좋아 좋은 계급으로 태어났을 뿐이면서 “가난은 이겨낼 수 있다”고 가르치려 드는 위선자들일지 모른다. 이렇게 서로 닿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를 추측하는 것만으로는 다채로운 삶의 모양이나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의 복잡함을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서로에 대한 편견만 강화하는 가운데 다른 계층에 대한 분노는 점점 커지고 이는 온전히 사회적 비용으로 산출되어 모두의 부담이 될 것이다.



밑바닥 공동체와 사라진 계급 사다리

긴축 정책은 연약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던 밑바닥 공동체를 완전히 와해시켰다. 저변탁아소 시절에는 영국 하층계급과 이민자, 중상층에서 스스로 내려온 히피들이 지지고 볶더라도 함께 어울렸다. 그러나 긴축 시대는 이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보통 이민자들을 약자로 규정하는 것에 익숙해 있던 내게 이민자에게 멸시받는 영국인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이민자들은 대중매체에서 선정적으로 그려지는 이미지를 그대로 학습하기 때문에 ‘차브’를 극도로 혐오한다. 저변탁아소 시절만 해도 하층계급 영국인들이 다수였던 탁아소는 긴축 시대로 오면서 이용자 대부분이 이민자로 채워졌다. 문화와 종교적 이유로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고, 자녀 교육에 열성을 다해 계급 사다리를 오르고자 하는 이민자들은 일하지 않고 생활보호수당으로 연명하며, 술과 마약에 빠져 있는 영국인들을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라 부르며 멸시했고, 자신의 아이들과 분리되길 바랐다.


그런 이민자들이 아니꼬운 영국인들은 탁아소를 점점 이용하지 않게 되었고, 긴축으로 인해 생활보호수당이 축소되어 탁아소에 올 차비조차 없는 가정이 늘면서 탁아소 내에서 이민자들의 발언권이 강해졌다. 그들은 영국의 다양성 교육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고 그로 인한 갈등은 해결이 더욱 어려워졌다. 이민자와 영국 하층계급은 자신들을 가난하고 폭력적인 환경으로 내모는 세력과 정치에 저항할 마지막 연대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탁아소는 결국 문을 닫고 그 자리에는 푸드뱅크가 생기고 만다.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푸드뱅크가 하필이면 탁아소가 사라진 자리에 생겼다는 것은 하층계급을 바라보는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여준다. 탁아소의 설립자 애니는 탁아소가 단순히 아이를 돌봐주는 곳이 아니라 교육의 장이자, 아이들의 부모를 지원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곳에서는 각종 교육 실험이 일어났고, 중상층 가정 아이들과 ‘발육의 격차’가 나지 않도록 조기 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보육 관련 직종을 꿈꾸는 학생들이 자원봉사를 하며 전문적이고 수준 높은 교육과 보육을 열정적으로 펼쳤다. 돈만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었을 장소는 결국 돈 때문에 무너진다. 긴축으로 정부가 보육사 양성에 투자를 하지 않자 대부분의 보육사 자격 취득 코스가 유료화되고 이는 자원봉사자 수의 격감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내게 ‘가난’이 지금의 처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존재하는, 다른 단계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 같은 것이었다면 영국의 하층계급이 처한 ‘가난’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정지된 흑백화면 같은 것이다. 나는 운이 좋게도 성실한 부모를 두었던 덕에 열한 살 무렵 방 두 칸에 양변기가 딸린 욕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이때부터 IMF 경제 위기가 끝날 무렵까지 우리 집은 조금씩 넓어졌고, 끝내는 새로 지은 3층 양옥에 문패를 다는 아빠를 지켜볼 수 있었다. 유년기 단칸방 살던 시절 옆집에 살던 네 명의 남매들도 모두 공부를 잘했기에 성공적으로 중상층에 진입했다. 우리에겐 기회가 있었고, 그 기회를 실현할 의지가 있었으며 때때로 행운이 따랐다.


영국 하층계급 아이들에게도 우리처럼 기회가 올까? 온다 하더라도 그걸 실현할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의지가 없더라도 예상치 못한 행운이 따르기도 할까? 책을 읽는 내내 긍정적인 답을 내기가 어려웠다. 저자도 저변탁아소 시절에는 밑바닥 진창에서도 장미가 피어오를 것이라 희망했다. 그러나 푸드뱅크에 와서 선반 위에 놓인 음식을 보며 소리 지르고 우는 부모와, 허기가 져서 웃을 기운조차 없는 아이들을 보며 “탁아소, 정치에 완패하다”(208쪽)라고 말한다.



진창에서 피어난 장미

이들에게 변화는 영영 오지 않을까? 밑바닥에는 절망만이 남은 것일까? 브래디 미카코는 혁명의 가능성 또한 밑바닥에서부터 가능하다고 말한다.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한 세상에서 ‘변화의 징후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은 언제나 낮은 곳’(323쪽)이기 때문이다.


로자리와 비키라는 여성이 있다. 로자리는 어린 시절 저변탁아소에 다녔다. 어머니는 헤로인 중독이었고 아버지는 폭행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로자리는 현재 유능한 보육사로 명문 사립학교 부속 유치원에서 일하고 있으며, 탁아소에 자원봉사자로 돌아왔다. 비키는 긴축탁아소에 다니는 말썽쟁이 켈리의 언니다. 약물과 알코올 의존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을 돌보는데, 불량소녀의 전형 같은 모습으로 다녀서 이민자 부모들의 회피 대상 1호였다. 그런 비키가 탁아소 자원봉사에 지원하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로자리와 비키가 부모와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이유는 탁아소를 교육의 현장, 정치의 현장으로 인식하고 있던 보육사들이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알아보고 지지해주었기 때문이다. 좋은 어른이 되려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기에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려는 마음을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밑바닥 정치

내가 단칸방에서 살던 어린 시절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서로의 존재가 필요했기에 존중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한다. 옆 단칸방에 살던 언니, 오빠들은 틈틈이 숙제를 도와주고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엄마하고 둘이 살던 친구네 집은 우리의 놀이방이나 다름없었다. 엄마가 아직 어렸던 언니와 나를 두고 보험 영업을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믿을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안쪽, 빛이 잘 들지 않던 단칸방에 혼자 살던 할머니에게 어른들이 돌아가며 반찬을 챙겨드리던 기억도 난다. 누가 김치라도 담그는 날엔 여섯 단칸방 식구 모두 재래식 화장실 앞에 돗자리를 펴고 함께 밥을 먹었다. 그런다고 서로의 처지가 나아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더 무너지지는 않았다. 연탄이 떨어지지 않도록, 전기나 수도세가 밀리지 않도록, 육성회비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가 없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서로를 보살폈고 그 보살핌의 결과로 나와 언니는 무사히 자랄 수 있었다.


나와 달리 이 시대의 가난한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감정은 존중보다는 ‘모멸감’이 아닐까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아이들과 책을 읽고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는데, 대부분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이다 보니 가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씻지 않아 늘 냄새가 나고 같은 옷만 입고 다니는 짝꿍의 집에 샤워 시설이 없을 수도 있음을 상상하지 못한다. 부모의 관심 속에 질 높은 사교육을 받는 자신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것이 운보다는 노력의 결과라 믿는다. 비슷한 평수의 아파트에서 살고 그 아파트 안 놀이터에서 놀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규격을 벗어난 삶은 동화 속에서나 존재한다. 가난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며 때로는 자신이 굉장한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하곤 하는 이 아이들에게 나는 무슨 수로 가난을 설명해야 할지, 또 그게 왜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인지 제대로 설명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내가 가진 것의 대부분은 행운의 결과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운이 나빴기 때문이다. 운이 나빴던 사람과 운이 좋았던 사람이 공정하게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방해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공정한 토대를 만드는 것은 결국 정치의 힘이다. 사회적 약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공정한 판을 깨려고 하는 사람들을 제어할 수 있는 것도 정치다. 어떤 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밑바닥의 삶이 달라졌다. 저자는 탁아소가 정치에 완패했다고 말했지만, 그와 함께 정치를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을 것이다.


저자는 긴축 탁아소가 폐쇄되고 푸드뱅크로 변한 모습을 보며 거기에서 없어진 것이 “아나키즘이라 불린 존엄성”(323쪽)이라고 말한다. 그 존엄성을 ‘땅바닥의 진창에서 수분을 흡수하고, 햇빛을 받지 못하는 가장 열악한 토양에서도 당돌하게 통통한 꽃을 피워내는 장미’(323쪽)라고 표현한다. 혐오와 배제가 퍼져나가고 있는 우리의 진창에서도 장미를 피워낼 수 있을까? 더 많은 로자리와 비키가 생겨날 수 있을까? 탁아소에서 정치의 힘을 깨달은 저자는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이다. “땅바닥에는 정치가 굴러다니고”(324쪽) 있으니 절망도 혁명도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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