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어린이 문학이라고 했다.
그런데, 들려오는 서평들은 하나같이 다 큰 성인들을 울렸다고 한다.
간혹 어린이 도서나 영화라지만, 어른들의 마음도 울릴 만큼 깊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게 바로 오늘 소개할 루리 작가의 『긴긴밤』이다.
어른들을 울린 도서를 나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마침 들려온 리커버 출시 소식에 소장까지 하게 되었다.(44쇄라니..!)
표지에는 뿔이 잘린 코뿔소와 작은 펭귄 일러스트가 있고, 펼쳐본 책 속의 큰 글씨를 보고서야 어린이 도서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루리 작가의 따뜻한 그림들과 충분한 여백으로 지루하지 않게 읽히고, 가독성이 좋았다.(활자로 빽빽하게 채워진 도서들만 읽다 보니, 숨통마저 트였다. 하하.)
코끼리 고아원?
첫 번째 파트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처음 등장하는 흰 바위코뿔소 ‘노든’은 코끼리 고아원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일상은 평온했고, 사람들의 보호 아래 허기질 일도 없었으며, 위험과 마주칠 일도 없었다.
까마귀가 들려준 바깥세상 코뿔소들의 이야기에 노든은 어딘가 자신과 닮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신기했고, 자신과 다른 모습의 코끼리들을 보며 궁금증을 품었다.
그럼에도 이곳에 머물기로 다짐했으나, 할머니 코끼리의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더 넓은 세상으로 가.”라는 말에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노든은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p.18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루리(2021), 『긴긴밤』 , 문학동네
바깥세상으로 나온 노든의 삶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멋진 풍경과 흥미로운 세계에 압도됐다.
코뿔소 무리를 발견한 노든은 그곳에서 아내를 만났고, 사랑의 결실로 소중한 딸이 태어난다.
아내와 딸은 노든이 상상했던 것 이상의 행복을 주었다. 어디에서든 셋이 함께했고,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만큼 다복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코뿔소의 뿔을 노리던 인간들로 인해 노든은 한순간 가족을 모두 잃고, 온몸을 다친 채 혼자 남겨졌다.
그런 노든을 발견한 다른 사람들이 어딘가로 옮겨 그를 치료해 주었고, 그가 옮겨진 곳은 바로 동물원이었다.
그날 이후 노든은 사람에 대한 복수심로 가득했다. 악몽으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이어졌고, 어떻게든 이곳을 탈출해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며 이를 갈았다.
그곳에는 노든과 같은 흰 바위코뿔소 ‘앙가부’가 있었다. 처음에는 앙가부에게도 심드렁했지만, 곁에 있어주고 함께 탈출을 도모하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p.30
“기분 좋은 얘기를 하다가 잠들면, 무서운 꿈을 꾸지 않아. 정말이야. 못 믿겠으면 시험 삼아 오늘 나한테 바깥세상 얘기나 들려줘 봐. 이봐, 나는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가 본 적이 없어. 같은 코뿔소끼리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하고 얘기 좀 들려줘. “
―루리(2021), 『긴긴밤』 , 문학동네
그런 앙가부조차 뿔 사냥꾼들에 의해 잃게 되고, 노든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흰 바위코뿔소가 된다.
충격에 빠진 동물원은 노든마저 잃을 수 없다며 그의 뿔을 잘라 낸다.
한편, 같은 동물원에 있던 펭귄 치쿠와 윔보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주인 없는 점박이 알을 자신들의 새끼인양 소중하게 품었다.
쉬지 않고 말을 걸었고, 가끔 먹는 것도 잊어가며 서로서로 온 마음 다해 알을 품었다.
p.46
치쿠가 걱정을 시작하면 윔보가 희망적인 얘기를 해 주었고, 윔보가 걱정을 시작하면 치쿠가 희망적인 얘기를 해 주었기 때문에 둘은 괜찮을 수 있었다. 알을 품는 하루하루가 치쿠와 윔보에게는 값진 날들이었다.
―루리(2021), 『긴긴밤』 , 문학동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전쟁’이라는 것이 떨어졌다.
윔보가 알을 품고 있던 덕분에 알은 무사했다. 치쿠는 남겨진 윔보를 뒤로 하고, 알을 챙겨 위험을 통과한다.
그 시각, 노든은 탈출하기 위해 물어뜯던 철조망이 무너진 것을 발견하고, 우리를 나와 철조망 밖의 땅을 밟는다.
위험을 피해 앞으로 나아가던 노든의 앞에 까만 새 한 마리가 나타난다. 치쿠였다.
치쿠는 양동이를 물고 있었고, 그 안에는 점박이 알이 담겨있다.
노든과 새와 알은 그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같은 목표가 있었고, 노든의 뒤를 따라 양동이를 입에 문 새가 걸어 나갔다.
노든과 새와 알은 동물원을 어렵사리 벗어났고, 그날 밤, 노든과 치쿠는 잠들지 못했다.
p.57
노든은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날은, 밤이 더 길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이후로도 그들에게는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루리(2021), 『긴긴밤』 , 문학동네
노든과 치쿠는 살기 위해 걸어야 했다.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곳이 나올 때까지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많은 것을 함께 보았고, 또 함께 했다. 그렇게 ‘우리’가 되었다.
그러던 치쿠에게 ‘바다’라는 목적지가 생겼다. 그곳에 닿으면 다른 펭귄들을 찾아 여행을 떠날 것이라 했다.
노든은 복수를 잊은 적 없지만, 치쿠와 알을 두고 갈 순 없었다. 그래서 바다를 찾을 때까지만 복수를 미루기로 했다.
무엇보다 치쿠와 보내는 시간이 좋았고, 함께 해야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기뻐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래서 바다에 함께 닿기로 한다.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치쿠는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노든에게 알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다.
슬퍼할 시간도 없이, 노든은 남겨진 알을 품었다. 그리고, 이름 없는 펭귄이 태어났다.
p.80-81
“나는 항상 남겨지는 쪽이었지. 내가 바보 같지만 않았어도, 용감하게 가족을 지킨 내 아내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내가 다리를 절지만 않았어도, 마음씨 고운 앙가부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라.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다면, 유쾌한 치쿠는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들이 항상 나를 괴롭게 해. 차라리 살아남은 게 내가 아니었으면, 하고 말이야.”
―루리(2021), 『긴긴밤』 , 문학동네
이름 없는 어린 펭귄의 시선으로 써진 책의 시점이 독특하고, 그 덕분에 더 큰 울림이 있었다.
험난한 세상과 좌절을 경험하며 살아온 노든과 이제 갓 태어난 순수하고 맑은 어린 펭귄의 우정은 따스했다.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본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방식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해 본다.
노든과 펭귄은 결국 바다를 찾았을까? 그들의 여정은 어떻게 될까?
루리 작가의 감성 가득한 그림과 울림 있는 글이 만나 따뜻한 책으로 탄생했다.
책을 읽는 동안 운명처럼 루리 작가의 신작 ‘나나 올리브에게’가 출간됐다. 그녀의 행보에 관심 어린 시선을 보내며, 모든 작품을 함께하기로 다짐한다.
p.83
하지만 나는 내가 본 적도 없는 치쿠와 윔보의 몫까지 살기 위해 살아 냈다기보다는 나 스스로가 살고 싶어서 악착같이 살아냈다. 그들의 몫까지 산다는 노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 후로도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일이다.
―루리(2021), 『긴긴밤』 , 문학동네
p.116
“이리 와. 안아 줄게. 그리고 이야기를 해 줄게. 오늘 밤 내내 말이야. 오늘 밤은 길거든. 네 아빠들의 이야기를 해 줄게. 너는 파란 지평선을 찾아서, 바다를 찾아서,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 이야기를 전해 줘.”
―루리(2021), 『긴긴밤』 ,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