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예스24에 쓴 IT 컬럼을 복붙합니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해마다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작은 걸음이 모여 어느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다. (2018. 07. 16)
원문 : http://ch.yes24.com/Article/View/36499
2018년 6월 4일, 애플의 연례행사인 WWDC 2018이 열렸다. 소비자 대부분은 애플이 발표하는 수많은 기능을 다 쓰지는 않기 때문에 기능보다는 ‘메이드 인 애플 기기’에 더 관심을 두기 마련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 WWDC에서는 기대하는 신모델에 대한 언급은 1도 없었다.
오직 새로운 iOS12, 맥OS14, 워치OS에 관해, 즉 소프트웨어만 소개했다. 사용시간을 제한하는 스크린 타임, 최대 32명까지 멀티 채팅을 제공하는 그룹 페이스타임, 실제 사물의 크기를 재는 메저 등 다양한 기능을 추가했다. 그렇게 다양한 기능을 추가했지만, 신제품을 기다리는 소비자는 애간장만 탈뿐이다.
이례적으로 하드웨어에 대한 언급 없이 소프트웨어만 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WWDC 외에 하드웨어나 특정 기능에 집중한 행사를 별도로 열어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이번에 발표한 OS에 무한한 혁신을 담았기 때문일까?
전자라면 다음 있을 하드웨어 발표 행사가 기대된다. 후자라면 WWDC를 지켜본 대다수 사람의 입장과는 견해차가 크다. 혁신을 담았다기보다는 불편한 제스처 기능을 이전 버전과 통일시키고, 이미 타사 제품에서 제공하는 기능을 이제서야 탑재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표한 소프트웨어는 iOS12라기보다는 iOS11.x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사실 이번 행사의 관심사는 더 저렴한 아이패드 프로 9.7인치의 공개와 판매 일정에 있었다. 1세대 아이패드 프로는 12.9인치와 9.7인치였다. 그런데 작년에 발표한 2세대 아이패드 프로는 12.9인치와 10.5인치였다. 증권가에서는 1세대에 있었던 9.7인치 아이패드 프로가 부활하고 무려 259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패드의 저변확대를 이끌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259달러라니! 어찌 목 빼고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출시된 지 오래고, 2017년 4월에 발표하고도 아직 출시하지 않은 맥 프로를 기대하는 바도 있었다.)
잡스가 심은 혁신의 DNA
1976년 애플을 창업한 잡스가 1986년 애플에서 쫓겨난 이후 다시 복귀한 1996년,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존 제품을 모조리 폐기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이팟을 만들었고 2001년 10월 처음 출시된 아이팟은 2004년 말 기준으로 미국 디지털 음악 재생기 시장에서 70%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춘추전국시대를 불방케 했던 MP3플레이어 시장을 애플이 평정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팟에서 멈추지 않았다. 대부분 사람은 스마트폰을 스티브 잡스가 최초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미 1992년에 IBM 사이먼이 있었다. 아이폰 출시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이 윈도우CE와 팜 같은 OS가 깔린 (당시에는 PDA라고 불린) 스마트폰을 업무와 생활에 사용했다. 그런 와중에 잡스는 2007년 아이폰이라는 스마트폰을 출시해, 전 세계 휴대폰 제조사를 죽음의 절벽으로 몰아냈다. 그 결과 잡스는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팀 쿡이 2011년 8월 잡스의 뒤를 이어 애플 CEO로 오르고 수많은 비난이 있었다. 2017년은 아이폰 출시 10주년이라서 기대가 더 컸던 탓일까? 아이폰9과 아이폰X 투 트랙 전략은 그중에서도 최고로 신랄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차라리 아이폰X만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이 글의 독자라면 술자리에서 한 번쯤 안줏거리 삼아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팀 쿡의 애플의 주가는 2011년 8월 당시 약 37달러에서 최고 193달러까지 올랐다. 매출도 매년 올랐다. 하지만 팀 쿡을 바라보는 시선은 개선되지 않았다. 칭찬은커녕 애플에 기대하는 혁신이 빠졌다며 불만이 거세질 뿐이다. 그렇다. 애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애플의 주가가 오르거나 매출이 늘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잡스가 보여준 혁신이 애플의 DNA에 심어졌다고 믿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핵심은 OS와 앱스토어
아이폰은 탄생 10주년을 넘어 11주년을 바라보고 있다. 잡스 사후에 애플은 많이 달라졌다. 아이폰의 크기는 커졌고, 플러스 버전이 나오기도 했다. 아이패드도 다양해졌다. 더 멋있고 더 강력해졌으며 더 편리해졌다. 그럼에도 아이팟과 첫 아이폰이 준 강력한 임팩트를 WWDC에서 다시 만난 기억이 없다. 아직도 애플은 잡스가 만들어 둔 기반 위에서 춤추고 있기 때문이다.
팀 쿡의 애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잡스의 업적에 무임승차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애플은 잡스가 칼을 휘두르면 기존 제품을 다 폐기하고 아이팟 하나만 주력으로 삼던 그런 회사가 아니다. 다양한 고객의 선호에 맞춰 다양한 상품을 선보인다. 그 중심에는 애플이 직접 공들여 만든 OS가 있다.
핵심은 OS와 앱스토어다. 아이폰은 iOS와 앱스토어, 안드로이드폰은 안드로이드와 구글플레이가 핵심이다. 안드로이드 진영의 플래그십 폰 자타공인은 삼성인데, 2018년 1분기에 오포, 비보, 화웨이, 아너와 같은 중국 기업의 세계 총판매량이 삼성을 앞질렀다. 삼성 같은 세계적인 제조사가 중국 업체의 추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가 OS와 앱스토어를 구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에 바다 OS를 독자적으로 시도하다가, (바다를 흡수한) 타이젠 OS를 세계 유수의 기업과 공동 투자하고 개발했지만, 안드로이드의 아성에는 흠집도 내지 못했다.
반면 애플은 이번 WWDC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핵심 가치를 한 발 한 발 키워가고 있다. 비록 iOS12가 혁신이 없는 버그 수정 버전이라는 조롱을 듣더라도 분명 한걸음, 아니 반의 반걸음이라도 자신만의 팬덤을 구축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해마다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작은 걸음이 모여 어느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다. 기대했던 신제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너무 낙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애플 사용자의 바람에 화답하듯 셀카가 더 잘 찍히는 차기 제품을 올해도 어김없이 선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