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휘군 Sep 11. 2020

 故 전미선 선배님을 생각하며

 원래 이 브런치는 작년에 했던 드라마 <조선 로코 녹두전> 관련된 얘기들을 정리해볼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녹두전 관련된 글이 쉽게 쓰이지가 않았다. 왜 글이 안 써질까. 어떤 감정이 남았나. 다 끝났고 다 정리된 게 아니었나... 이런 생각들을 하다 글이 안 써지는 이유를 알았다. 아직 풀리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 다른 이야기들 앞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조선 로코 녹두전>의 조연 캐스팅이 처음 시작됐을 때, 천행수 역할로 제일 먼저 떠오른 배우가 바로 전미선 선배님이었다. 극 중 천행수가 보여줘야 하는 다정함과 카리스마를 다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배님께 제안을 드리면서도 응해주실지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미 대본이 8회까지 나온 상황이었는데, 8회에 천행수 역할이 퇴장하는 내용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조연이지만 출연 회차는 절반. 이런 조건을 부탁드리는 게 송구스러웠다. 하지만 선배님은 흔쾌히 출연에 응해주셨다. 무척 기뻤다. 

 캐스팅이 확정된 후 선배님과 미팅을 따로 가졌다. [나랏말싸미] 촬영을 하며 예쁜 한복을 실컷 입어보았는데, 녹두전에서도 그럴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또 가을 경 다른 드라마에 출연할 예정이라 중간에 퇴장하는 것도 시기가 딱 맞는다 하셨다. 뭘 준비하면 되겠냐고 물어보시기에 액션이 조금 있을 것 같은데, 액션스쿨에서 연습을 받으실 수 있겠냐고 여쭤보았다. 딱 한 번, 작은 칼을 쓰는 씬이었지만 선배님께선 그것도 선뜻 응해주셨다. 

 공식적인 전체 리딩이 끝나고 며칠 뒤 '리딩 엠티'를 갔다. 한시쯤 가서 저녁 먹기 전까지 내내 리딩을 하다가 저녁을 먹은 뒤부터는 파티를 하는 일정이었다. 선후배 연기자분들이 조금이라도 친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추진한 행사였다. 선배 연기자들과 젊은 연기자들이 섞여 조를 꾸리고 여러 게임을 했는데 전미선 선배님의 활약이 대단했다. 선배님은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김태우 선배님과 함께 호흡을 맞춰 만담과 몸개그를 펼쳤는데, 구경하던 우리들이 웃다 쓰러질 정도로 재밌었다. 밤새 웃고, 떠들고, 다들 낯가림도 없어지고, 이제 첫 촬영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그렇게 되지 않았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게 오보라고 생각했다. 아니 며칠 전까지 우리가 그렇게 즐겁게 놀았는데. 선배님의 웃는 얼굴이 아직도 생생한데. 도대체 왜. 이게 대체 어떤 상황인지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함께 엠티를 갔던 배우들도 모두 충격을 받아서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하지만 나도 믿어지지가 않으니 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빈소에 가서 절하고 울고 그게 끝이었다. 

 집에 돌아와 관련된 기사를 보는데 윤유선 선배님이 빈소에 찾아오신 뉴스를 보았다. 윤유선 선배님은 예전에 내 단막극에 출연해주셔서 인연이 있었다. 선배님께 어려운 부탁을 드렸다. 부탁을 드린 당일에 하겠다고 답장이 왔다. 윤유선 선배님은 전미선 선배님과 대학생 시절부터 인연이 있다고 하셨다. 그의 떠난 빈자리를 왠지 자신이 채워야 할 것 같았다고... 무거운 마음을 전해주셨다. 다른 연기자들이 이미 수 차례 호흡을 맞춘 상황에서, 윤유선 선배님은 뒤늦게 합류해 많은 고생을 하셨다. 그 마음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선배님이 떠난 뒤 우리 팀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힘든 상황이 계속 있었지만 아무도 힘들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농담하며 지냈다. 뭔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떠난 고인의 마음이 편하실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더 끈끈해진 채로 드라마를 무사히 마쳤다.

 고인에게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 어떤 마음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일이 생긴 뒤 이리저리 수소문해보았지만 그렇게 듣게 된 이야기도 완전한 진실을 담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그저 선배님의 삶의 무게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졌기를 빌었다. 가시는 길이 편안하시기를 빌었다. 우리에게 보여준 그 밝은 미소가 그곳에서도 이어지기를 빌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작가의 이전글 비트코인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