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2일차.
오늘도 아침 5시에 일어났다. 프랑스길을 걸을 땐 알베르게 안의 거의 모든 사람이 4~5시면 일어나 짐을 싸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선 아무도 일어나는 사람이 없다. 불을 끈 상태로 짐을 챙기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나와서 걷기 시작한 시간은 대략 6시 반쯤. 이렇게 아침 일찍 걷는 이유는 11년 전 순례길을 걸을 때 스페인의 태양에 혹독하게 당한 기억 때문이다. 어떻게든 태양을 피해서 다녀야지 생각부터 드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걸어보니 포르투갈의 태양은 스페인의 태양과 다르다. 일단 표준시가 한국인의 체감과 안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선 해가 오전 8시 쯤 뜬다. 아침 6시면 밝아지는 한국과 다른 것이다. 포르투갈에서 가게들이 늦게 문을 여는 이유도 해가 늦게 뜨는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표준시를 당기지 않는 걸까? 등의 생각을 하며 걷기 시작했다.
발이 많이 부은 상태라 오늘의 신발은 크록스. 상황은 첫날과 거의 비슷한데, 두번째 날엔 난이도가 한 단계 더 올라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준비해간 우비를 꺼내 입고 파도치는 해안가 길을 걸었다.
아픈 발을 진통제로 누르고, 빗속을 뚫으며 길을 걷다 보니까 맘 속에 이런저런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내가 이 길을 왜 걸을까. 11년 전엔 참 좋았는데 왜 지금은 안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깨달았다. 아, 내가 자꾸 과거와 비교를 해서 좋지 않은 거구나.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만 해도 나는 젊었고, 유럽 여행을 길게 한 적이 별로 없었다. 덕분에 알베르게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신기했고 그들과 나누는 대화들이 모두 즐거웠다. 그들과 오다 가다 스치고, 숙소에서 만나고, 음식을 나눠먹고 했던 것들이 당시의 내겐 신선한 경험이었던 거다. 그런데 이곳 포르투갈에서 11년 뒤에 같은 경험을 하는 나는? 과거에 비해 여행 경험도 많고, 체력은 떨어졌고, 사람들도 궁금하지 않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늙은이의 마음 상태로 여길 왔구나. 이 길이 나에게 의미가 있으려면, 마음 상태를 바꿔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세 시간쯤 걸으니 발 통증이 심해졌다. 쉬어갈 곳이 없는지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인근에 문을 연 커피숍은 딱 한 군데. 가보니 동네 주민들로 만석이다. 이 커피숍은 베이커리를 겸하는지 여러 종류의 갓 구운 빵들이 있었다. 빵들은 모두 달아보였다. 그나마 덜 달아보이는 빵 하나를 사서 에스프레소와 같이 먹었다. 원래 카페인에 취약한 몸이라 커피를 마시지 않는데, 여긴 포르투갈이니까. 커피는 맛있었으나 양이 매우 (매우!) 작았고, 빵은 역시나 달았다. 매일 이렇게 먹으면 안 될 거 같다. 아무래도 이동 중에 먹을 음식을 마트에서 사서 배낭에 넣고 걸어야 할 거 같다.
위에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안 오는 것도 아닌 상태로 한참을 걸었다. 걷다가 체코에서 온 60대 아저씨를 만났다. 서로 소개를 하는데, 이름을 두번이나 들었는데 어떻게 발음해야할지를 모르겠다. 내가 데이비드, 마이크 같은 영어식 이름에만 익숙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저 사람들도 내 이름을 알아듣기 힘들겠지. 역시 언어 공부는 평생 해야 되나 보다.
아저씨와 두 시간 정도를 동행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아저씨가 나에게 먼저 물어본다.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나왔지?
네. 근데 전 안 읽어봤어요.
나는 채식주의자 읽어봤는데, 별로였어.
와우! 한국 사는 나도 안 읽어봤는데, 문학 좋아하시나봐요.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랑 무라카미 류 좋아해.
와, 포르투갈에서 체코 출신 하루키 팬을 만날 줄이야. 문학과 술을 좋아하는 아저씨와 한참 얘기하다가, 아저씨가 어느 커피숍에서 쉰다기에 헤어졌다. 이 아저씨와는 여정 중에 두 번을 더 만나게 된다.
아저씨와 헤어지고 혼자 걷는데, 내 앞 뒤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길에 사람이 없으면 아무래도 걷는 속도가 빨라지게 된다. 길을 걷는 것이 그냥 숙제를 해결하는 느낌이 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루트를 걸을 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불편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아무도 없는 길을 걸으니 차라리 북적북적한 게 좋겠다라는 생각도 든다. 이토록 간사한 마음이란.
아저씨와 헤어지고 두 시간 정도를 걸었는데, 그 뒤로 단 한 곳의 커피숍도, 그늘도, 앉을 곳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 아저씨 쉰 커피숍에서 나도 쉴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커피숍 입구에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 쉴 곳 없음!' 이라고 써놓으면 장사가 더 잘 될 텐데.
길을 걸으면서 어제 읽었던 한강 작가님의 수상 소감을 생각했다. 글에서 작가님의 품격이 느껴졌다. 인상적이었던 건 그런 문구였다. 본인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정신없이 지나간 거 같은데 글을 쓰던 순간만큼은 기억에 확실히 남아 느껴진다는 거. 그 정도로 집중해서 어떤 일을 해야 성취를 이룰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은 머릿속에 세 가지 이야기를 굴리고 있다는데 마침 나도 머릿 속에 세 가지 이야기를 굴리고 있다. 이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보내려면 나도 작가님만큼 온전히 집중해야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의 목적지 marinhas까지의 거리는 26km. 막판에 발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거의 워킹스틱에 의지해서 걸었다. 그래서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약국에 들러 액체 파스를 샀다. 이번엔 실패하지 않기 위해 검색을 많이 했다... 흑...
어제 알베르게에서 노숙자 아저씨 때문에 험한 경험을 한 터라 오늘은 호스텔로 예약. 호스텔에 도착해보니 분명 다인실을 예약했는데 2인실로 안내한다. 뭐지? 하고보니 같은 방에 있는 아저씨의 상태가 좋지 않다. 바지는 피투성이고, 입은 옷은 더러우며 눈에 초점이 잘 맞지 않는다.
오늘도 노숙자인가 싶었는데 호스텔 주인이 나를 조심스럽게 불러다 얘기하는 게, 저 아저씨는 올해 초에 아내를 잃고 뇌졸중이 와서 쓰러졌다가 일어난 사람인데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다고. 근데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이 숙소에서 2박째 하고 있다는 거다. 다친 다리는 오늘 조금 걸어보려 하다가 넘어져서 저렇다고. 불편하면 방을 바꿔주겠다는데 나야 뭐, 어제 만난 노숙자처럼 냄새나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쓰겠다고 했다.
짐을 풀며 아저씨와 대화를 시도했다. 아저씨가 말씀을 잘 못하셔서 자신에 대해 적힌 종이를 보여주신다. 나는 뇌졸중 환자입니다. 나는 영국에서 왔습니다. 등등이 적혀 있는 종이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대체 산티아고길이 뭐길래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마침 파스를 산 터라 드릴까 했더니 괜찮다고 하신다. 병원에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니 그것도 괜찮다고... 아저씨가 자기는 신경쓰지 말라고 바깥으로 나가셨다. 그래서 샤워를 한 뒤 쿨링 파스로 발을 마사지 하고 있었다. (덕분에 살았다. 효과 최고) 그런데 이번엔 배드버그가 내 침대에서 기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꽉 눌러 잡아보니 피가 팍 터진다. 와... 내 침대에서 베드버그를 본 기분은 진짜 말도 못한다. 옷을 다 빨아야되나? 샤워를 다시 해야되나? 오만 생각이 든다. 숙소 주인에게 얘기 하니 방을 바꿔준다고 한다. 같은 방을 쓰는 아저씨는 어떻게 되냐고 했더니 물어보겠다고 한다. 그렇게 방을 옮기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 여행이 참 다사다난하구나 싶다. 그 와중에 아저씨가 마음이 쓰인다. 내가 본인 때문에 방을 옮겼다고 생각하실까봐. 그래서 아저씨를 기다렸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방을 옮겼다고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결국 만나지 못했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날 저녁, 계속 달달한 빵 같은 걸로 식사를 간단하게 때운 터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었다. 검색을 해서 인근 지역에서 별점 높은 바베큐치킨집 오픈을 기다렸다. 구글에 6시라고해서 5시 40분쯤 가보니 7시 오픈이랜다. 아.. 9시에 자고 5시에 일어나는데 오픈이 7시면 어쩌란 말이냐. 먹자마자 자면 역류성 식도염 걸린다고요. 주변을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파스타 집이 열려있어 가보니 파스타는 7시부터 된다고 한다. 피자만 주문 가능하다고 해서 결국 피자 주문. 아무래도 포르투갈에선 빵만 먹을 운명인가 보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