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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군 Nov 22. 2024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 루트 후기 (3)

 간밤에 자는 동안 몸살 기운이 있었다.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해져서 가져간 플리스 재킷을 입고 잤다. 갑자기 이럴 이유가 없는데 왜일까... 생각해보니 원인은 내가 바른 파스 때문인 거 같다. 쿨링 젤을 발에다 마사지한 뒤로 손이 시려웠거든. 손에 체온이 내려가 파랗게 되길래 아뿔싸했는데, 역시나. 계속 마사지를 하려면 아무래도 오늘 비닐 장갑 같은 걸 사야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몸살 기운 때문인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예전에 힘들게 모셨던 드라마국 대선배님이 있는데, 그 분 작품의 B팀 감독이 되는 꿈이었다. 쉽게 말하면 군대 입대 하는 꿈과 비슷한 걸 꾸었다. 뭐야 이거. 오늘 험한 일 또 있나?

 전날 마트에서 사온 사과와 바나나로 간단히 열량을 보충한 뒤 3일째를 시작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viana do castelo. 거리는 26km. 포르투갈 루트의 어려운 점은 숙소를 갖춘 도시가 많이 없어 여정을 탄력적으로 잡지 못한다는 거다. 3~5km마다 숙소가 하나씩 나오는 프랑스 루트에 비해 비교적 먼 거리를 목표로 잡아야 하고, 중간에 계획을 바꾸기가 어렵다. 거기에 화장실이나 휴식 장소 문제를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초보자에게 추천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 길이다.

  

그래도 걷다보니 어느덧 산티아고까지 208km


 오늘도 비가 온다. 우비를 입고 그저 걷는다. 어떤 마을을 지나는데 갑자기 대포 터지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무슨 행사가 있나? 행사라기엔 거리에 사람들이 없는데. 아마도 대포는 성당에서 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날이 포르투갈의 기념일 같은 거였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비구름 사이로 연기들이 흩어졌다. 계속 이어지는 대포 소리를 뒤로 하고 계속 길을 걸었다. 


 3일 간 걸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건 술과 관련된 생각이었다. 갑자기 웬 술이냐고? 의식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올해 7월에 이사를 했는데, 이사를 도와주러 오신 어머니께서 냉장고에 술밖에 없다며 놀란 일이 있었다. 나도 놀랐다. 내가 술을 저렇게 많이 마시는 구나 싶어서. 그 뒤로 술을 줄여야겠다라고 생각은 했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리스본과 포르투를 관광하면서도 매일 술을 마셨다. 포르투에선 아예 와이너리 투어만 이틀을 다녀왔다. 그 중 한 곳의 와이너리에선 너무나 맛있는 포트와인을 발견해 370ml 한 병을 구입하기도 했다. 그 술이 지금 가방 안에 있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기념으로 마실 생각으로 챙겨놨다. 수건 무게 50g을 어떻게 줄일까 고민하던 내가 370ml짜리 술은 들고 걷는 거다. 병 무게를 포함하면 500g은 될텐데,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지만 술을 가방에 넣고 걸은 건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걷는 내내 '술의 무게'를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내 삶을 끌어내리는 술의 무게. 내 배낭을 끌어내리는 술의 무게. 

 술을 많이 마시다보니 몸에 잡다한 병을 달고 살게 된다. 역류성 식도염, 통풍, 지방간... 아마 발에 생긴 염증들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중병은 없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은지는 꽤 되었다. 그게 술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그런데 아킬레스건염과 족저근막염을 달고 걸으며 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술이 문제구나. 걷기 시작한 뒤로 진통제를 먹느라 술을 먹지 못했는데, 그전보다 확실히 몸이 가벼워진 걸 알 수 있었다. 배낭 안에 들어있는 370ml 포트와인이 내 어깨를 짓누르고, 그걸 들고 온 내 어리석음이 내 어깨를 짓누르고... 그런 생각들을 하며 걷다가 결심했다. 술을 끊자고. 

 술을 끊기로 결심했지만 배낭 안의 술은 차마 버리지 못했다. 미련이 좀 남았나보다. 계속 걸으며 이 미련마저 떨쳐내야지. 


이게 배낭에 넣고 걸었던 포트 와인이다. 이건 시음할 때 찍은 사진. 들고 걸은 건 한 사이즈 작은 병이다. 맛은...


 길을 걷다가 아주 뜬금없는 곳에 차려진 휴식터? 를 만났다. 농장 한쪽에 간이 지붕만 만들어놓고 과일 과자 커피 같은 것들이 놓여있는 곳이었는데 딱히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아서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런데 걷다보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 앉아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너무 밝았던 것이다. 뭘까 하고 검색을 해보니 세상에, 농장 주인이 순례자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곳이었다. 먹고 싶은 만큼 먹고 원하는 만큼 기부를 하고 가면 되는 곳이었는데, 내 마음이 너무 걍팍해서 그런 호의조차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거다. 그러면서 쉴 곳이 없다고 불평하던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좀 더 내려놔야겠구나. 내 마음이 아직 가난하구나. 


 오늘의 코스는 산이 좀 많다. 오솔길 옆으로 강이 흘렀다. 길을 걷다 독일에서 온 20대 여자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리자. 작년에 와서 일주일을 걸었고, 올해도 일주일을 걸을 예정이며 내년에 다시 온다고 한다. 유럽에선 이런 식으로 띄엄띄엄 이 길을 완주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리자에게 이 길이 어떤 게 좋아서 매년 오냐고 물었다. 자신은 여기서 영적인 체험을 많이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이 길을 걸으면 충만해지는 느낌이 든단다. 

 사실 나도 이 길을 걸으며 영적인 체험을 한 적이 있다. 11년 전 프랑스 루트를 걸을 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을 겪었는데, 리자의 말을 들으며 자연스레 동의하게 됐다. 나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고. 이게 산티아고 길의 힘일까.

 걷는 도중 강에서 의식을 치르는 현지인들을 만났다. 지켜보니 강물을 성수처럼 뿌리는데, 저게 세례식인가? 싶었다. 아마도 저런 사람들이 있어서 이 길이 충만해지는 게 아닐까.

 

어떤 의식인지 모르겠다. 물어보고 올 걸!


 리자와 영혼이 실제로 있을까? 같은 대화를 하다가 헤어졌다. 그 뒤로 혼자 쭉 걷다가 인근에 문을 연 유일한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했다. 까르보라나를 시켜 먹었는데 딱히 맛은 없었지만 그저 빵이 아니라 따뜻한 식사라 좋았다. 부디 오늘 저녁에도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기를.

 점심을 먹은 뒤로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졌다. 어제는 왼쪽 발목이 아프더니 오늘은 오른쪽 발목이 문제다. 염증이 번갈아가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등 가운데, 척추 오른쪽 부분이 찢어질 것 처럼 아픈데 아마 등근육ㅡ엉덩이ㅡ발목이 다 연결된 문제일 것이다. 하루만 더 걸어보고 어떻게할지 생각을 해봐야겠다. 포기는 고려하지 않고 있지만 가방을 보낸다든지 하는 건 고민해봐야할 거 같다.

 어렵게 도착한 숙소는 해발 150미터? 정도 되는 산 위에 있었다. 해안 마을 한 가운데 남산처럼 작은 산 하나가 뾰족 올라와있고, 그 정상에 산타루치아 성당과 숙소가 있다. 산 아래에서 숙소 위치를 보고 약간 정신이 나가서 마구 웃었다. 게다가 내일은 저 산을 다시 내려와야 한다. 오메!

 산 아래에서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아 택시를 불렀다. 택시는 한참을 구비구비 올라갔다. 이때만 해도 택시를 탄 게 오늘 내가 한 최고의 선택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위에 와보니 아무 식당도 마트도 없다! 오로지 자판기에서 파는 작은 물과 과자와 미소라면과 참치캔이 끝. 음식을 사기 위해 다시 내려갈 힘도 없어서 결국 미소라면을 구입했다. 안 어울리는 메뉴지만 단백질은 좀 먹어야 될 거 같아서 참치캔도 샀다. 오늘 저녁 메뉴는 참치미소라면이다! 


산 정상에서 보는 노을이 예쁘다고해서 선택한 숙소였는데 정작 물안개때문에 10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참치를 볶고 미소라면과 곁들인 오늘의 저녁식사. 점심에 먹은 까르보라나보다 나았음!


 몸의 긴장이 풀리니 오늘도 몸살기운이 있다. 오른 발목은 꽤 부어올랐다. 아무래도 내일이 최대 고비가 될 모양이다. 사과를 샀던 비닐봉지로 손을 감싸고 쿨링 젤을 열심히 발랐다. 부디 내일의 컨디션이 양호하기를. 

 몸 상태가 안 좋아 8시쯤 자려고 누웠는데, 독일인 무리가 열명정도 들이닥쳤다. 청소년들이 여럿 보이는 게 세 가족이 같이 온 모양이다. 그중 다섯명이 나 혼자 있던 6인 침실에 들어왔고 나머지는 옆방에 갔는데, 대체 누가 산티아고길에서 한국인이 빌런이라고 했나? 독일인도 사람이 많아지니 똑같다. 술판 벌이고 시끄럽고... 밤 10시가 돼도 멈출줄을 모른다. 

  말을 튼 독일인들에게 산티아고길을 전에 와봤냐고 물어보니 처음이란다. 왜 프랑스길을 걷지 않고 여기로 왔냐고 물어보니 거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싫다고 한다. 아무래도 가까운 나라다보니 산티아고길과 관련된 후기, 다큐 같은 것도 많은가보다. 요즘 독일에선 프랑스길 말고 다른 길을 걷는 게 추세란다. 그러고보니 내가 이 길을 걷다 만난 사람들 중 독일인이 가장 많다. 길을 걷는 사람 중 거의 절반은 독일인이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 어디서 유튜브라도 나온 걸까. 산티아고길의 흐름은 이렇게 달라지려나보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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