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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 루트 후기 (4)

by 휘피디

순례길 4일 차. 아무래도 오늘이 고비가 될 거 같다. 어제 자기 전에 몸살기운이 심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여전히 몸상태는 좋지않다. 그래도 일단 출발했다. 힘들어도 몸이 적응하겠지 싶었다. 숙소 1층 구석에 보니 배낭을 부칠 수 있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정해진 위치에 배낭을 놓고 가면 된다고 하는데 안내를 아무리 읽어봐도 그 뒤에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겠다. 애초에 배낭을 보낼지 말지 마음이 반반이었던 터라 그냥 배낭 메고 가기로 했다. 정 힘들면 택시 타지 뭐.


20241020_065416.jpg 물안개 낀 아침 6시의 산타루치아 성당.


아침 6시에 무작정 길을 나섰지만 해도 뜨지 않고 산 위에 물안개까지 자욱히 껴서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럴 줄 알고 미니 랜턴을 챙겨왔지! 그런데... 이 놈이 10분도 되지 않아 방전이 되어버렸다.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검은 길을 절뚝이며 걸었다. 한참 걷다보니 길을 잘못 든 것을 알았다. 다시 한 번 정신 차리고,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서 방향을 잡아갔다.

오늘의 목적지는 caminha. 거리는 27km. 까미냐에 도착하면 스페인 해안길을 걸을지, 아니면 강을 타고 스페인 내륙으로 걸어갈지 결정해야 한다. 나는 일단 내륙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바다를 며칠 동안 계속 보면 지겨울 거 같기도 하고, 기왕 포르투갈을 왔으니 조금이라도 더 포르투갈을 걷고 싶어서다.

길을 몇 차례 헤맨 끝에 산을 내려와 길을 걷기 시작했다. 두어시간을 걸었는데 오늘도 그 어떤 카페도, 마트도 보이지 않는다. 전날 마트에 가지 못해 물과 음식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먹을 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는 주린데 마침 비는 쉬지 않고 온다. 여정이 시작된 후로 가장 빡센 날이다.

몸이 힘드니 마음이 간사해진다. 애초에 순례길이라는 게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에 있는 성당들을 연결해놓은 길이다. 그런데 포르투갈 길을 걸으면서 문을 연 성당을 거의 보지 못했다. 성당에 도착해도 문이 닫혀 있고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찍지도 못하니 보람이 반감되는 느낌이 든다. 이런 상황에 몸까지 힘드니 자꾸 마음이 꼬신다. 그냥 도로 따라 직선으로 가면 안 돼? 왜 꼬불꼬불 작은 길로 걸어야돼? 그럼 거리가 더 멀어지는데?

그런 유혹에 휩싸인 채 아무 가게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걷다가 체력이 방전되었다. 도로로 나가서 어느 식당이든 가겠다고 마음먹고 순례자 길을 이탈했다. 그런데 그렇게 걷기 시작한지 5분도 안 되어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헤이! 유! 유! 돌아보니 어느 집 2층에 사는 주민이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나한테 소리를 지른다. 그 길이 아니랜다. 그래서 설명을 했다.


나는 배가 고프다. 문 연 가게를 찾고 있을 뿐이다.

그쪽엔 가게가 없어! 문을 닫았어. 그냥 순례자 길로 가! 그럼 곧 가게를 만나게 될 거야!


가게가 문을 닫았다니 그 사람의 말에 수긍하고 왔던 길을 돌아가 원래대로 순례자 길로 합류했다. 사실 처음엔 짜증이 났다. 웬 시어머니인가 싶었다. 조금이라도 여정을 줄여보고 싶었던 내 얄팍한 마음이 들켜서 생긴 짜증이리라.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순례자 길로 재진입하고 10분도 되지 않아 문을 연 가게가 나타났다. 순례길을 걷다보면 누구나 천사를 만나게 된다는데, 그 사람이 나에게 천사였던 걸까. 그 사람은 어떻게 딱 그 타이밍에 창문을 열고 나를 봤을까. 역시 이 길은 재밌다.


어렵게 만난 커피숍에서 제대로 서버복을 차려입은 할아버지가 준 빵 두개와 환타, 물까지 든든히 먹고 출발. 이제는 조금이라도 단축해서 가보겠다는 마음도 사라지고 그냥 가라는대로 열심히 갔다. 밥을 먹어서 그런지 뭔가 몸 상태도 좋아진 느낌이다. 내딛는 발에 힘이 들어간다. 마침 비도 슬슬 그쳐간다. 절로 노래가 나온다. 단 몇 미터라도 코스를 줄여보고 싶었던 한 시간 전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은 왜 이리 다를까.

몸에 여유가 생기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포르투갈의 동네 길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조용한 길을 걸으며 어제 생각하던 것들, 그러니까 술을 어떻게 할지, 내가 맺은 인연들, 앞으로의 작품 활동 같은 것들을 생각했다.


20241020_083603.jpg 정원을 재밌게 꾸며놓은 집
20241020_121640.jpg 포르투갈에 불교 신자가?


기운을 차리고 두 시간 정도 더 걸었다. 이제 식사할 때가 됐는데 여전히 식당은 보이지 않는다. 비가 다시 추적추적 내린다. 이 비는 내 컨디션과 싱크로를 맞춰서 내리는 것 같다. 점점 힘들다는 느낌이 강해질 때쯤, 문을 연 식당을 만났다. 들어가보니 현지인들이 많이 있어서 안심이 된다. 서버와 얘기해보니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식당 안 다른 테이블 사람이 먹고 있던 음식을 가리키며 저걸 달라고 했다. 영어는 못해도 이건 이해하겠지. 안심하고 기다리는데 이게 웬 걸? 한참 기다린 끝에 나온 음식은 아주 쌩뚱맞은 요리였다. 나는 밥에 감튀에 고기 올라간 일반적인 식사를 시켰는데 웬 어향탕수요리가 나왔다. 황당했지만 그냥 먹기로 하고 한 입 뜨는데, 뭐야 이거. 왜 맛있어? 오늘 나는 이런 일이 생길 운인가 보다! 웃으며 열심히 먹었다.


20241020_125921.jpg 이 요리가 나왔을 때의 황당함이란...


식사를 든든히 먹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망망대해가 펼쳐진 바닷가길이 펼쳐진다. 탁 트인 풍경 안에 파도가 거세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청량해져 가슴이 벅차다. 이 맛에 포르투갈 루트를 걷는 구나 싶다.


20241020_134149.jpg 시원하게 펼쳐진 대서양
20241020_140037.jpg 봉 까미노!



시원한 바다를 끼고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술을 진짜 끊어야지. 서울에 가자마자 냉장고에 있는 술을 다 처분해야겠어. 배낭 안에 있는 술은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체코에서 온 아저씨와 우연히 또 만났다! 아저씨와 함께 걸으며 술을 끊을 결심에 대해 얘기했다. 술 좋아하는 아저씨는 안타까워했다. 너와 한 잔 할 기회가 있으면 좋을텐데! 하지만 술 끊는 건 응원할게. 그렇게 걷다가 caminha에 도착했다. 아저씨는 여기서 보트를 타고 스페인으로 건너가서 숙박을 한다고 하고, 나는 이 도시에서 숙박이다. 아저씨는 해안길을, 나는 내륙길을 걸을 것이다. 서로 루트가 다르니 아무래도 산티아고에 도착한 뒤에나 만나게 되겠지. 아저씨와 헤어질 시간이 되어 문득 아저씨한테 말했다.


포트와인 좋아해요?

난 포트와인 달아서 싫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포르투에서 안 달고 진짜 맛있는 포트와인을 발견했어요. 그게 지금 내 배낭안에 있죠. 산티아고에 가서 마시려고 샀거든요.

와우. 맛이 궁금한데?

잘됐네요. 지금 그 와인을 선물로 주려던 참이거든요.

왜? 산티아고에 가서 마신다며! 이것까지는 마시고 끊어!

뭔가를 끊어내려면 단번에 끊어야 되잖아요. 당신한테 이걸 선물할 수 있어서 기뻐요. 이게 내가 구입한 마지막 술이 될 겁니다.


그렇게 아저씨한테 포트와인을 줬다. 아저씨는 매우 기뻐했다. (아저씨 이름을 세 번이나 들었는데 발음하지 못해서 다시 물어보지 못했다. 큭 ㅠㅠ) 좋아하는 그를 보내고 스페인과 대서양이 보이는 강변이자 바다변에 앉았다. 뭔가 마음이 홀가분했다. 아직도 세상은 내게 너무나 크고, 난 아직 늙은이 흉내내기엔 멀었다. 다시 한 번, 힘차게 발을 내딛어야지.


20241020_153216.jpg 강 건너 스페인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내디딜 준비를.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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