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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 루트 후기 (5)

by 휘피디

간밤엔 호스텔에서 묵었는데, 6인실을 나 혼자 썼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으로 넘어가서 숙박을 하나보다. 스페인의 인프라가 포르투갈보다 좋아서 그런 걸까. 어쨌든 나야 방을 혼자쓰니 쌩유! 갑자기 이탈리아 아웃 비행기 티켓을 산 터라 밤엔 로마행 티켓을 예약하며 시간을 보냈다. 10월 28일에 로마로 떠나는 티켓을 알아봤는데, 산티아고부터 한번이상 경유해야하는 비행기 티켓이 최하 35만원씩 한다. 29일에 떠나는 비행기는 15만원짜리가 있지만 시간이 애매하다. 고민하던 중 낮에 체코 아저씨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아저씨에게 산티아고에 도착한 뒤 로마로 떠난다고 얘길 한 뒤의 대화다.


산티아고에서 로마로 가는 비행기가 있어?

마드리드 경유하는 비행기가 있더라고요. 가격은 좀 비쌌지만.

그럼 마드리드까지 기차로 가는 게 낫지 않아? 그게 훨씬 쌀 걸.


아저씨 말대로 검색을 해보니 실제로 산티아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는 것보다 훨씬 싸다! 마드리드에서 로마가는 비행기는 단돈 7만원. 산티아고에서 마드리드 가는 기차는 9만원에 예매했다. 체코 아저씨한테 준 술값을 이걸로 받는 구나 싶었다. 아저씨 고마워요!

간밤에 산 빵과 주스로 배를 채우고 길을 떠났다. 숙소를 나왔을 때 다른 순례자들을 몇 보았는데, 다들 보트를 타고 스페인 루트를 걷는지 나와 행선지가 다르다. 졸지에 사방 천지에 나 혼자 걷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 와중에 비는 또 얼마나 세게 내리는지... 맑은 하늘 좀 보여줘!


20241021_074959.jpg 비가 좀 그친 뒤, 홀로 걷는 순례길.


빗속을 정신없이 걷고있는데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친한 형이 카톡 프로필을 보고 전화를 준 것이다. 어떤 일로 갔냐고. 괜찮냐고. 한국을 떠난 후 받은 첫 연락이라 그런지 형의 마음씀이 참 고마웠다. 소회를 몇가지 얘기하다 술을 끊겠다고 얘기했더니 너무 좋은 결심이라고 응원해준다. 한참 수다를 떨다 대화가 투자로 넘어갔다. 형 수익률 괜찮아요? 나는 지금 이래. 미국 대통령 누가 될 거 같냐. 등등의 대화들. 옛날엔 만나서 의미없는 농담만 해도 재밌었는데 이젠 누굴 만나든 자연스레 투자 얘기가 나온다. 돈을 벌고, 모으고, 굴리는 것이 중요해지는 나이다.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나 보다.

통화를 마친 뒤 가지고 있는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할지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주식들 중에 수익률이 가장 좋은 것은 거장들의 포트폴리오를 따라 산 것들이다. 미국에서 1억달러 이상의 돈을 굴리는 투자가는 1/4분기마다 포트폴리오를 공개해야한다. 그 투자가가 3월 30일에 가지고 있던 포트폴리오가 대략 5월 초 쯤 공개된다. 약 한달이 넘는 시차가 있는 셈이지만 저걸 따라사도 수익률이 괜찮다. 워런 버핏이 처브를 샀다기에 처브를 샀고 스탠리 드러켄밀러가 cohr을 샀다길래 그걸 따라샀다. 그렇게 산 주식들이 다른 고민으로 샀던 것보다 훨씬 수익률이 좋다. 앞으로도 계속 이 방식을 쓸지 고민해봐야겠다.


걸은지 5일 째가 되니까 몸이 좀 적응을 한 모양이다. 아니면 술을 안 먹어서 염증이 줄었나? 발 상태가 제법 걸을만 하다. 등에 찌르르 울리던 통증도 나아졌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20241021_133746.jpg 순례자 주의!


한참걷다 식당이 보이길래 들어갔다. 햄버거 세트를 파는 사진이 붙어있길래 그걸 달라고 했다. 햄버거도 별로였지만 음료 값을 따로 더 달라고 해서 화가 났다. 아니 누가봐도 세트메뉴잖아. 그리고 주문할 때 햄버거 '세트' 라고 했잖아. 근데 왜 돈 따로 받음? 따지니 사진에 나오는 것 중에 커피만 세트고 콜라는 세트가 아니랜다. 계속 따지니까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것처럼 군다. 아까 주문할 땐 잘만 받아놓고... 와, 고작 1.5유로 때문에 이렇게 기분이 상하기도 하는구나.


20241021_115603.jpg 세트 메뉴같죠? 그런데 아님


말도 통하지 않고, 계속 싸워봤자 답도 없어서 그냥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웃기는 게 다시 걷기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않아 버거킹을 발견했다ㅋㅋㅋ 이땐 헛웃음이 나왔다. 며칠 전 나를 농락했던 버거킹... 오늘 또 다시...? 맛없는 햄버거를 속아서 먹은 게 억울해 무작정 버거킹에 들어갔다. 나 버거킹 햄버거 맛이라도 볼 거야! 그렇게 배가 부른데도 오기로 와퍼를 하나 시켜 먹고는 나왔다. 오늘도 재밌는 하루로구나!


참 신기한 게, 처음 걸을 땐 생각이 많았는데 5일 쯤 되니 생각이 사라진다. 내딛는 발걸음의 리듬에 맞춰 잡념들은 사라지고, 어느새 나와 길만 남는다. 이런 기분이 참 좋다.

며칠 내내 비만 맞다가 오늘 숙소에 도착할 즈음, 오랜만에 맑은 하늘이 되었다. 정말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유럽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일광욕을 좋아하는지 단번에 이해해버렸다. 온 몸을 감싸던 습기가 갑자기 싹 밀려날때는 흡사 감동까지 느껴진다.

20241021_170544.jpg 얼마만에 보는 파란 하늘인가!


pedro da torre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원래 tui같은 큰 도시에서 숙박을 하게끔 일정을 조율하는데 전체 일정을 하루 당겨보고 싶어서 추천코스보다 조금 더 많이 걸었다. 매우 넓은 대지에 지어진 별장 같은 숙소다. 짐을 푸니 호스트 안나가 묻는다. 저녁식사를 먹을래? 10유로야. 오브콜스! 항상 저녁밥이 고민이었는 걸. 짐 풀고, 빨래를 하고 널고, 같은 방을 쓰게 된 독일 출신의 마티스하고 인사 좀 트고 시내로 나왔다. 요 며칠 걷는 동안 숙소에 도착한 뒤 시내 구경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맑은 하늘이 이렇게 강하다.


20241021_170722.jpg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던 pedro da torre의 기차역. 구름이 걷히고 있다.


오늘은 포르투갈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다. 포르투갈은 낙후한, 느긋한 도시로 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실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는데 프랑스에서처럼 내가 시킬 줄 몰라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과거 프랑스를 여행할 때 음식이 기대보다 별로여서 실망한 적이 있다. 그런데 여행 막바지에 우연히 프랑스 현지 유학생을 만났는데, 음식이 별로라고 하니 자신과 같이 식사를 하자는 것이다. 그 친구가 데려간 식당에서, 그 친구가 주문한 음식들을 먹고 깜짝 놀랐다. 너무 맛있어서!) 아니면 포르투갈과 나의 시간대가 맞지 않았을지도.

저녁이 되어 숙소에 돌아왔다. 안나가 차려주는 포르투갈 가정식이 기대된다. 맨날 빵과 햄버거 같은 것만 먹었는데, 제발 오늘 저녁은 따뜻하기를!

저녁 식사는 마티스와 체코에서 온 리나, 나. 이렇게 세 명이 같이 앉아서 먹었다. 메뉴는 스프와 빵과 스튜와 와인이었다. 음식은 맛있었고 마티스, 리나와의 대화도 즐거웠다.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건 호스트인 안나였다. 안나는 원래 포르투갈 남부 사람인데, 산티아고길이 좋아서 남편과 함께 북부 끝자락인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순례자에게 쉴 곳과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큰 기쁨이라고. 안나는 여정은 어땠는지, 어떤 걸 느꼈는지 물어봐주었다. 다들 와인을 마시는데 나는 안 마시니 술을 어쩌다 끊게됐는지 얘기가 나왔고 그것에도 공감해주었다. 그 다정함에 포르투갈길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내 마음이 녹아내린다. 이런 경험을 포르투갈 길 마지막에 하게 되다니, 이 또한 신의 안배일까. 툴툴대며 걷던 아재의 마음을 녹이는데는, 포르투갈에 대한 인상이 바뀌는데는 조금의 다정함으로도 충분했다.


20241021_191905 (1).jpg 포르투갈식 스튜
20241021_195242.jpg 고마웠어요! 안나, 줄리, 마티스와 함께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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