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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연 보는 휘 Mar 24. 2021

거리두고 보기

뮤지컬 <펀홈>과 연극 <히스토리보이즈>를 중심으로


관객으로서나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 있어서나 2020년은 쉬운 해가 아니었다. 또한 공연계의 경우 비대면 형태로의 전환 등 여러가지 시도들이 진행되기도 하며 시행착오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마스크 없이 웃으면서 공연을 관람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또 익숙했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는가를 돌이켜보게 되는 그런 한 해. 그러다보니 대면 생활을 편히 했던 지난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커져만 갔고, 과거에 대해 돌아보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게 되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작년에 상연된  공연들 중 인상 깊었던 2개의 공연들에 대해 그들의 텍스트 자체를 두고 어떻게 그들이 지난 시절에 대한 접근을 취하고 있는지를 파악해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 이전 사회에서 우리가 나를 어떻게 구성했으며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가 맞이한 2020년이 우리가 타인과 관계를 형성해가는 데에 있어서 다른 형태로의 전환점을 제공할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변화가 공연의 텍스트나 그를 소비 방식 등의 공연의 외적 형태에 변화를 줄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제기해보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들의 회상법

관객은 누구나 공연을 감상하면서 어떤 인물에게 또는 이야기 자체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공감은 우리가 그 공연장 안에서의 체험을 오래 남는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감정 이입의 여지를 만드는 것 중에 가장 큰 부분은 그와 관련된 ‘경험’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의 과거를 담아낸 이야기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아마도 어떤 형태로든 살아가면서 가족을 만났고 학교에 다녔다. 연극 <히스토리보이즈>와 뮤지컬 <펀홈>은 그렇게 회상적 서사구조로 인물들의 삶을 묘사하며 관객들의 과거 기억을 건드린다.


연극 <히스토리보이즈> (2013년도 연강홀에서 국내 초연, 앨런 배넷 작)는 영국 셰필드 고등학교에 다니는 엘리트반 학생들이 명문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수업을 듣는 과정을 담아내었으며 뮤지컬 <펀홈> (2020년 이해랑 예술극장에서 국내 초연, 리사 크론 작) 레즈비언 만화가 앨리슨 백델이 자신의 유년시절 아빠에 대한 기억을 중심으로 자신의 유년시절을 그린 그래픽 노블 <펀홈>이라는 원작을 뮤지컬의 형태로 각색한 작품이다.


의외로 두 작품이 꽤 많은 공통점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두 작품이 결국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방향성은 상이하다. <히보>의 경우 학생들 각자가 지니는 상징성과 교육자들의 대립되는 교육적 가치관들 그리고 곳곳에서 등장하는 역사에 대한 관점들이 모여 결국 학교라는 공동체를 보여주는 데에 기여하며 이는 구체적인 사건들과 결합되어 하나의 아이러니를 완성시킨다. 극에 등장하는 대사대로 ‘이미 일어난’ 일을 관객은 객석에서 보며 그 그들이 말로만 논하던 것이 실제 그들의 삶이 되었을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의 결과를 더 잘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시니컬한 극의 관점이 두드러지며 관객들 또한 모순적인 인물들을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한편, <펀홈>의 경우는 조금 더 개인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클로짓 게이였던 아버지 브루스와 레즈비언 만화가인 나 사이의 평행관계에 대해 얽혀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횡단하며 밝혀 나가며 그를 발판으로 더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될 것임을 예고하며 마무리된다. 원어 대본집의 서문에서는 그 역시 하나의 캐릭터임을 강조하는 서문이 있긴하지만, 어찌되었든 서술자와 같은 기능을 하는 43세 주인공 앨리슨이 실시간으로 관객과 함께 과거를 바라보고 있는 관점을 제시해주기 때문에 원작 만화에 비해 앨리슨이 배우의 연기와 어우러져 조금 더 원작 만화에 비해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인물로 나타나면서 조금 더 활기를 띄게 되고, 때로는 과거의 앨리슨들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앨리슨이 위로 받는 구도가 생겨나기도 하면서 <히보>에 비해 관객이 조금 더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작품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펀홈> 극작가의 시선이 조금 <히보>에 비해 더 따스하게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점은 <히보>에 비해 무대 위 등장하는 <펀홈>의 기억 파편들이 조금 더 거친 형태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두 작품의 과거 회상의 시작을 돌이켜봐도 그렇다. 학교로 처음 돌아갔을 때 아이들이 마구 교실로 쏟아져 들어오며 밝은 음악과 함께 A-level 시험 결과를 확인하는 모습에 비해 다 기억나- 를 43앨리슨이 부르는 동안 그녀의 과거 기억 속 모든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 누군가의 실제 기억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굳이 친절하게 이 기억은 이런 의미라고 관객에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관객은 충분히 소위 ‘정상 가족’의 이미지를 표면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집을 가꾸며 살아가는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한 앨리슨의 기억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본다. 특히 그는 밝은 멜로디로 진행되는 넘버인 raincoat of love에서 정점에 달한다고 할 수 있다. 철저히 앨리슨의 기억들로만 극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극의 마지막 순간마저 그때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와 같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 지니게 되는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공연은 끝나버리지만 그러나 관객들은 미화되지 않은 거친 조각들을 한번 되짚어본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다 괜찮아 베이베 함께 있으면”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어떤 문학 작품들에선 지나갈 거라고 하던데요.” “하지만 문학작품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건 그게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는 거야.” “지나갈거다.”


두 작품 모두 이런 과거의 어느 한 부분을 다루면서 다른 매체의 특성을 끌고 온 연출 장치를 통해 관객들이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한 채로 극을 보게 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펀홈>이 만화가라는 앨리슨의 설정에 맞게 만화의 네모 컷 모양의 조명으로 인물들을 담고 캡션이라는 앨리슨의 주석으로 첨언을 하며 거리를 두고 있으며, <히보>는 성인이 된 학생들의 관조적인 방백을 과거의 기억들에 대해 큐 소리와 함께 녹화된 비디오처럼 빠른 템포로 전달한다. 


공연 장르가 줄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순간 중 하나를 꼽자면 대비가 강한 극적 조명이 만들어내는 특정한 순간들일 것이다. 그 조명은 <펀홈>에서 경계를 만들어준다. Telephone wires에서처럼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 지어 주기도 하며 Maps에서는 브루스가 평생 벗어나지 못한 그의 마을 그리고 그를 넘어선 앨리슨의 경계를 묘사한다. <히보>에서는 여러가지 가능성들 중 하나가 실현되는 그 순간의 긴장감을 조성해주기도 한다. 특히 <히보>의 조명의 경우 그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부여하는 데에 큰 기여 한다. 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 시간대의 붉은 빛과 학생들이 장난을 치며 영화를 재현할 때 슬로우 모션과 함께 들어오는 핀 조명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사실은 그렇게나 인상적인 순간이 아니었음에도 미화되어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어느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극 중 인물 스크립스의 어느 한 대사가 떠오르는 듯 하다. “제 자신을 특별히 좋아해본적은 없지만, 그 겨울날 아침 춥고 사람도 없는 교회에 무릎을 끓고 있는 그때 제 모습을 생각하면, 그립고 가슴이 아파옵니다.” 


문학작품의 인용들은 인물들의 간접적인 심리 상태를 대변하는 중요한 도구로서 활용된다. 때로는 그 인용들은 단지 자신의 고집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장식일 뿐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심장으로 느낀 것들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펀홈>의 브루스와 <히보>의 헥터가 자신의 성적 지향성에 대해 자신의 딸, 혹은 제자에게 간접적으로 이야기 하는 장면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히보>에서는 시를 통해 변두리에 위치한 두 인물이 서로에게 유대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앨리슨은 브루스의 말들에 담긴 의미를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성이 차이가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들이 사는 사회

아마도 그러한 차이의 브루스와 앨리슨 그리고 헥터와 포스너가 각각 가족과 학교라는 다른 사회화 기관 속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그 기반에 있을 것이다. 가족은 그 동안 많은 매체에서 소재로서 다루어져왔다. 창작자들은 저마다 가족에 대한 저만의 관점을 담아 이야기를 전개해왔다. 그렇다면 <펀홈>이 집중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은 어떠할까? 기본적으로 가족은 우리가 태어난 후 처음으로 만나 사회화를 맞게 되는 조직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을 얻고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운다.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가까운 삶의 모습에 익숙해진다. 마치 벡델가가 집안 대대로 ‘funeral home’의 가업을 이어왔기에 어렸을 때부터 앨리슨이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가족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그렇지만 결국 앨리슨을 구성하는 일부는 분명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왔음을 간과할 수 없다. 앨리슨이 브루스와 비슷한 관점으로 문학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펀홈>은 마치 반듯하게 액자에 걸린 사진처럼 고전적인 가족의 정의의 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줄 수 있는 상처에 대해 주목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안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을 수 없는 애증의 관계를 담아낸다. 앨리슨은 자신의 가족에게 상처를 준 브루스를 미워하지만 또 그의 극단적인 선택을 계기로 자신이 놓쳐버린 순간을 계속해서 되새기며 그를 알고 싶어하니까. 가족은 분명 나에게 정서적인 안정과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나를 고통 속에 던져주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 좋고 나쁜 기억 모두가 모여 결국은 오늘의 내가 완성된다.


“그리고 그 다음은 지금의 나야. 안녕?”


앨리슨이 조앤에게 자신에 대해 깨닫게 된 과정을 설명한 후 뱉는 그녀의 결론. 결국 브루스와 앨리슨이 다른 삶을 살게 된 데에는 시대적인 배경의 차이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되었을 그 시기에 조앤이라는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앨리슨은 조앤을 학교에서 만났다. 우리는 자라나면서 가족을 거친 후 학교라는 사회의 축소판에서 더 넓은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다른 경제적 문화적 환경을 갖춘 사람들과 만나며 학생들은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알게 된다. <히보>의 교실만 봐도 가지각색의 아이들이 각자의 서사를 지니며 살아감을 확인할 수 있다. 


<펀홈>이 그랬듯이, <히보> 또한 학교의 이중적인 면모를 동시에 드러낸다. <히보>의 아이들이 물론 엘리트 학생들이라는 설정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단순히 지식적 측면 외에도 그 아이들은 극 중 대사대로 선생님들보다 때로는 더 많은 것을 알고있을 정도로 똑똑하다. 학교는 생각보다 더 잔혹한 곳이다. 성인들의 사회구조와 권력관계는 학교에서 그대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서열이 분명히 있고, 그 서열에 따라 때로는 자기들만의 연대가 생성되고 폭력적인 관습이 묵인되기도 한다. 누구는 모든 것을 다가지기도 또 누구는 그렇지 못하며 학교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이런 류의 서열은 아마 그들의 졸업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처럼 보인다.


한편 그런 혼란 속에서 개인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더욱 굳건히 확립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교육이 있다. 어떤 교육이 학생들에게 필요한가를 두고 <히보>는 계속해서 대립되는 의견을 제시한다. 누구나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운 무언가가 나중에 불현듯이 떠오르며 모호했던 감정들이 명확해지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삶의 교훈을 선생들이 제자에게 넘겨주는 행위는 그렇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단열재로 학생들에게 기능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실적으로 지금의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을 도와주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반대의 교육관을 주장하는 헥터와 어윈의 교육 모두 우리 학교에 필요하다. 물론 그들은 기억에 남고 싶었던 범죄자와 거짓말쟁이기도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면서 고통을 거친다. 그렇지만 헥터 말대로 무조건 우리가 고통을 거쳐야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은 난롯가 앞을 위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입시 사정관들은 새롭고 독특한 학생을 원한다. 그렇지만 어윈의 논지는 결국 홀로코스트 씬에서 드러나듯 모든 상황을 모호하게 퉁쳐버리게 되는 위험성을 지닌다.  


우리가 사는 사회

코로나가 찾아오면서 우리는 일상의 많은 방식을 비대면으로, 특히 온라인으로 더욱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 온라인을 매개로 한 관계 형성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더 이상 급속도로 기계화 도시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인간 소외와 단절만이 있으리라 단정하기엔 소설 <서울, 1964년 겨울>때와 달라진 바가 없다. 오히려 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온라인 시스템이 정착하지 못한 곳에 시스템을 보급하기도 하면서 좀 더 편리하게 생활하고 불필요한 만남을 줄여가면서도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의 경우 사실상 대면 수업을 진행할 때와는 달리 아직까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론 의외의 분야에 대한 수업이 어려울 뿐 아니라 현장 수업에 비해 진행할 수 있는 수업의 방식의 폭이 좁아지며 상호간의 피드백이 이루어지는 수업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집중도가 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교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인 ‘작은 사회’에 대한 경험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이런 비대면 학교 생활이 장기화 된다면 식사 시간과 쉬는 시간 동안 학생들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며 얻게 되는 소통 능력과 사회성을 어디서 보완하게 될지가 궁금해진다. 특히 올 한 해 동안 코로나로 인해 OTT 서비스 가입수가 크게 증가하고, 맞춤형 광고와 컨텐츠를 띄우는 SNS 이용시간이 증가하면서 알고리즘에 맞추어진 필터 버블에 더욱 갇혀있을 수 밖에 없게된 우리가 나와 다른 입장에 처해있는 누군가와 공적인 것 이외의 주제를 두고 소통하는 기회를 이전에 비해 얻기 어려워졌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한편, 우리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전에 비해 서로와 미쳐 나누지 못한 대화를 나누고 몰랐던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계기를 이 상황이 제공해준 것이다. 아마 이렇게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가족과 홈파티의 형태로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던 해는 오랜만일 것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너무 자주 시간을 함께하게 되면서 가족 간 갈등이 증가했으며 독립적인 공간이 보장되지 못한 채 업무를 가족이 있는 곳에서 보게 되면서 이로 인한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가정 내의 기술적인 환경이 한정적인 경우 누가 그 기술을 독점하여 이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타인과 계속해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 타인이 하루 종일 나를 지켜볼 수 밖에 없게되는 상황은 개인의 휴식을 방해하며 <펀홈>의 앨리슨처럼 가족과의 적당한 거리감을 통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사적인 시간이 줄도록 한다.


오래된 희곡인 <인형의 집>이 연극<wife>에서 다른 시간대에 따라 계속해서 변주되며 공연되었던 것처럼,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했을 때 우리의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굳어진다면 그로 인해 생겨나는 인간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기준은, 소소한 인물들의 설정부터 공연이 다루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세지까지도 내용적인 변화를 야기할 것으로 예측된다. 혹은 지금은 다소 실험적이라고 여겨지는 영상 연출의 활용이 극의 메시지를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느껴지면서 비판받는다면 언택트 형태의 삶에 조금 더 익숙해진 지금을 겪고 난 후라면 그 이후의 시대에는 좀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공연의 외적인 측면에선 온라인 시스템이 좀 더 정착화 되었을 때 공연 문화의 대한 대중적인 인지도가 조금 더 상승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영국의 NT live처럼 우리나라도 레퍼토리 공연들을 해외에 적극적으로 배급하게 될지, 또 온라인 오프라인 관객을 동시에 받으며 공연이 진행되기도 할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는 2020을 어떻게 회상하게 될까

평생을 공연에 삶을 바친 한 배우가 마지막 공연을 올리게 되는 과정을 다룬 연극 <더 드레서>. 공연 속 배우들은 전쟁 상황을 앞두고 포탄의 습격을 맞으면서도 공연을 올린다. 배우는 그 곳을 그런 상황에도 찾아준 관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공연을 보면서 이 메타적인 장치가 주고자 하는 의미는 2020년의 우리들에게 건네는 위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공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사실 이 시기가 정말 모두에게 쉬운 시기가 아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게 되면 <히보>처럼 우리는 이 또한 하나의 역사로 돌이켜보며 이러쿵 저러쿵 그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게 될까. 앨리슨이 과거의 일기를 보며 “뭐래?”하는 것처럼 우리도 지금의 시기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그땐 왜 그랬지?라며 넘길 수 있을까. 어쩌면 럿지의 말이 맞을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역사는 X같은 일 다음에 또 X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포스너의 마지막 대사대로, 우리의 하루가 “행복하진 않지만, 불행하지는 않은” 하루이지 않을까라는 그런 말을 건네본다. 그렇게 모두를 응원하고 싶다.




한정민

공연을 좋아하는 관객. 현재 다양한 미디어를 공부중입니다. 인간간의 관계를 다루고 비유를 활용하며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애매한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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