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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연 보는 휘 Feb 20. 2020

미국 뉴욕에서의 연극학 박사과정 첫 학기에 대한 단상2

2. 그럼에도, 좋았던 점.

    그럼에도, 아직 이곳이 마음에 든다. 마이너 어그레션에 피로하고 속상해져도, 가정집 방 한 칸에 900불을 내도, 집 가는 길에 철로에서 쥐들끼리 싸우는 소리에 놀라도, 한국과 달리 이 좌석에 이 가격을? 싶어도, 연극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뉴욕은 분명 매력적인 곳인지라.


그럼에도, 좋았던 점. 


동기의 밴드 Cookie Tongue의 신보 발매 기념 파티. 연극하는 친구 아니랄까 봐 드라마터그가 확실했던 공연.


1. 동기와 선배들을 잘 만났다.

    우리 학교 연극과 박사과정은 아담한 과라서, 한 학년에 6~7명 정원을 받는다. 워낙 수도 적고, 일곱 명 다 고통스러운 박사과정 첫 학기라는 동지애에 아무래도 오손도손 지내게 됐다. 누가 공연 올리면 모여서 보러 가고, 같이 종종 마가리타도 마시러 가고, 힘들 땐 서로 잘 다독여주고 챙겨주는 그룹이라 인간관계 스트레스가 덜어진 것만 해도 정말 다행. 다들 알잖아요, 대학원은 좁아서 한 번 인간관계 어긋나기 시작하면 지옥길이 펼쳐진다는 것을.


    다 같은 연극과 이지만, 서로 주안점을 두는 지점과 직업, 살아온 배경, 문화적 배경과 연구주제가 다 달라서 이야기하고 같이 수업 들으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온다. 헤이티 문화 연극을 연구하는 교육가 친구, 일본 시체 연극 부토를 하는 음악가 친구, 프릭 쇼와 그로테스크에 관심이 많은 극작가/사운드 디자이너 친구, 근세 연극을 연구하는 영문과 출신 친구, 아랍계 연극을 쓰고 이민에 대해 연구하는 극작가 친구, 미국에서의 드라마터그의 역할과 무용에 대해 연구하는 드라마터그 친구. 이 사이에서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즐겁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생산해낼 수 있을까? 자극도 받고 고민도 되고, 같이 있어 다행이고 즐거운 사람들.


    선배들도 고마운 사람들이 많아서 첫 학기를 잘 버텼다. 애칭으로 불러주면서 매일 얼굴 볼 때마다 별 일 없니, 버틸 만하니? 하고 체크인해줬던 선배도 있고, 처음이라 모르는 일이 많아 허둥댈 때 잘 챙겨준 선배도 있다. 동아시아계 연극을 공부하는 동아시아계 유학생으로서 답답함을 느끼는 지점에 대해 같이 술 먹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선배도 있고. 재밌고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선배들 덕분에 다음 학기부터는 우리 학교에서 아시아계 연극 연구하는 유학생들끼리 모이는 공부 서클에 들어가게 됐다. 벌써 기대된다. 오래갔으면 좋겠는 모임.


2. 연구 분야 다듬기

    현대 연극 뮤지컬과 젠더/섹슈얼리티. 이 정도만 해도 꽤 좁힌 줄 알았는데 택도 없었다.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은 어느 문화권의 연극을 공부할 것이냔 질문이었음. 장소를 이야기하면 장소/시대/큰 주제가 대략 좁혀지니까. 그런데 그 질문이 그렇게 대답하기 힘들더라. 어디에서 활동을 하게 되느냐에 따라 요구하는 지점이나 갈 수 있는 길이 달라지기 때문에.


    첫 학기 수업을 들으면서,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내가 바라보는 시선, 다른 사람들의 주제와 관심 범위 등을 쭉 지켜보다 보니 어느 정도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좁혀야 할 때가 왔다는 것도 막연히 느껴진다. 지금은 동아시아 현대 연극을 기반으로, 국내 창작 뮤지컬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작품과 주제도 대략적으로 브레인스토밍 하게 되었다. 내가 흥미로워 파고들 수 있는 요소들, 내가 잘 아는 분야,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 현실적으로 내가 연구자로서 파고들 수 있는 담론 집단이 누구인지, 내가 담론에 기여할 수 있는 작업이 뭔지 생각하고 있다.


3. 다양한 기회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

    기회, 기회, 기회가 많다. (난 영주권자도 레지던트도 아니라 나에게 허용된 기회는 체감 상 3분의 1로 줄어드는 것 같긴 한데.) 출판을 할 기회, 에디터로서 일을 할 기회, 학자를 만날 기회, 글로브에서 연기를 배울 기회, 타학교의 도서관의 리소스를 사용할 기회, 여러 연극 관련 작업을 해볼 기회. 다만 새삼 기회의 차이란 뭘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태어난 곳이란 뭘까, 사용하는 언어란 뭘까, 환경이란 뭘까.


    요즘은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 한국어, 영어, 일어는 학교 졸업 여건의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어서, 기왕 동아시아계 연극을 전공하는 김에 중국어까지 구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에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중국 관련 매체에 눈이 더 가는 편. 마침 상해 희극학원에 우리 과 교수님 산하의 연극센터가 있고, 그 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 중 우리학교 박사생들을 한 달 파견해서 수업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과정이 있다. 앞으로 1~2년 중국어 공부를 한 뒤, 상희에서 연극 수업을 가르쳐보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음. 수업은 영어로 진행하겠지만, 한 달이나마 살면서 언어에 더 노출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

 

4. 스스로에 대해 돌아보기

    우선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업량,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작업량, 하고 싶은 작업량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안달 내지 말아야 하는데 사실 이게 제일 어렵다. 안달 내면 욕심낸 만큼 열심히 하고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있고 해내더라도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일들도 있다. 시간과 노력이 해결해주리라 믿을 뿐. 그래도 생각보다 이 정도면 무난하게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내 공부 스타일과 천성, 그리고 상황이 부대껴서 생기는 여러 마음의 흐트러짐은 있지만 견딜 수 있는 수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많이, 깊게 했다. 나의 스펙트럼에 대해, 공부 방향에 대해, 인간관계와 가족의 개념에 대해, 디폴트 값과 노머티비티에 대해. 그 덕에 스스로의 어떤 면에 대해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학기를 지내고 있는 지금, 이번 학기는 저번 학기에 비해 수업도 하나 더 듣고 교내 활동도 두 개 더 하는 삶이지만 이상하게 저번 학기보다 심적으로 여유 있는 학기다. 한 번 겪어봐서도 있지만, 엄청 울퉁불퉁한 길을 우왕좌왕 달리다 간신히 운전대를 잡고 버티게 된 기분. 손끝에 감이 오는 기분. 여전히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비슷한 즐거움 속에서 살고 있다. 첫 학기, 잘 버텨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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