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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를 꿈꾸며

by 걷고

2015년 경이다. 시청에서 글쓰기 강좌가 있어서 처음으로 참석한 날이었다. 지금 마음에 떠오르는 주제로 글을 써 보라고 했다.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때 쓴 제목이 ‘산티아고를 꿈꾸며’였다. 선생님은 산티아고가 어떤 의미인지, 왜 거기를 가야 하는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등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되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때 쓴 글을 수정하고 정리한 것이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길, 산티아고>의 서문이다.

2012년 걷기 동호회에 가입해서 처음으로 걷는 날이었다. 누군가가 동호회에 나온 이유를 물었다. “산티아고에 가려고요.” 무심코 나온 답이었다. 그 이전인 2010년경에 한 후배로부터 산티아고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고, 800km의 순례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2017년 환갑 기념으로 산티아고에 다녀왔다. 돌이켜보니 2010년부터 산티아고 준비를 해 온 것이다. 우연히 접한 책 한 권이 불씨가 되어 7년이 지난 후에 불꽃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그냥 흘려버린 것들이었다. 책 한 권을 선물 받아서 읽은 것뿐이었다. 글쓰기 주제가 딱히 떠오르지 않아 산티아고로 정했다. 동호회에서 받은 질문에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고 싶지 않아서 그냥 던진 말이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대변하고 있다. 상담에서 내담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주의 깊게 듣는 이유 중의 하나도, 내담자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중요한 내용을 무심결에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언행이나 주어진 환경에도 우연은 없다. 후배의 선물도, 글쓰기 강좌의 주제도, 걷기 동호회에서 그냥 한 답변도 우연이 아니었다. 자신이 한 말과 행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그에 따른 결과도 반드시 찾아온다. 그러니 말 한마디, 행동 한 가지라도 허투루 할 일이 아니다. 말이 씨가 된다.


언젠가 해파랑길을 걸을 때였다. 걷다가 정자에서 쉬고 있는데 렛고님이 걷기학교에서 안나푸르나를 진행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갑자기 그 얘기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렛고님의 남편이 걷기학교에서 안나푸르나를 진행한다면 참석하고 싶고, 그 이후부터 걷기학교에 참석할 의사가 있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다. 안나푸르나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기에 얼버무리고 끝났다. 작년 말, 한강변을 걸으면서 본각님이 내년(2025년)에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목표로 활기찬 한 해를 시작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치 가야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하자고 말씀드렸고, 뒤풀이 장소에서 걷자님한테 조사와 준비를 부탁드렸다. 그날 참석한 분들 대부분은 분위기에 이끌려 참석 의사를 밝혔다. 막상 공지를 하면 참석 여부가 변할 수는 있겠지만, 걷기학교에서 안나푸르나호는 항해 준비를 하고 있다. 렛고님이 불씨를 만들었고, 본각님이 불을 지폈고, 걷자님이 장작을 넣고 있다.


왜 갑자기 가고 싶어졌을까? 본각님의 제안에도 대충 얼버무릴 수 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자고 약속을 해버렸고, 뒤풀이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도 했다.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다. 답 대신에 가야만 된다는 합리화 작업을 하고 있다. 티베트, 네팔, 인도는 늘 마음의 안식처 같은 곳이다. 불교라는 공통점이 있고, 달라이 라마께서 인도의 달람살라에 머물고 계신다. 언젠가는 그분을 친견할 날을 마음속으로 발원하고 있다.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일단 마음에 불씨 하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한국 불교의 큰 스승이신 송담스님을 뵙기까지 40년의 세월이 흘렀고, 우연한 기회에 그분을 독대하는 영광을 누렸던 경험이 있다. 마찬가지로,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는 달라이 라마님을 뵐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의 불씨를 간직하고 있다. 비록 뵐 수는 없더라도 그분이 계신 곳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가서 그분의 존재를 느끼고 싶다.

이유는 못 찾았지만 명분은 찾았다. 목표는 ABC가 아니다. 그러니 ABC까지 가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산티아고를 걸을 때는 무조건 콤포스텔라 성당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목적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는 걸음걸음마다 부처님의 현신이신 그분의 존재를 느끼며 걷는 순례에 있다. 산티아고는 순례길이지만 내게는 걸어야만 하는 길이었다. 나를 찾기 위해, 또 인생 2막의 길을 찾기 위해 걸어야만 하는 길이었다. 이 자체가 순례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단 한 번도 산티아고를 순례했다고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안나푸르나는 순례길이다. 티베트인들이 몇 년에 걸쳐 오체투지를 하며 달람살라에 도착해서 달라이 라마님을 친견하는 순례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마음만은 그런 마음으로 이 길을 걷고 싶다.


네팔의 인사말인 나마스테는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께 경배한다’는 의미다. 나의 본성이 그대의 본성을 존중하고 경배한다는 의미다. 길을 함께 걷는 길벗,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과 마주친 상황들을 모두 존중하고 경배하며 걸으면 된다. 이번 트레킹의 인사는 ‘부엔 까미노’ 대신 ‘나마스테’다. ‘좋은 길’을 뜻하는 ‘부엔 까미노’는 ‘나마스테’와 만난다. 길은 좋고 나쁨이 없으며 서로를 비교하지 않는다. 길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길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할 뿐이다. 따라서 길은 본성이다. 너와 나 역시 본래면목, 본성, 불성은 하나다. ‘너’와 ‘나’를 분리하지 않고, 비교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이기심이 본성을 오염시킨다. 본성은 본래청정이다. 길도 본래청정이다. 그러니 산티아고는 안나푸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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