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201]

FIRE족(族)

by 걷고

날짜와 거리: 20210405 6km

코스: 사천교 – 홍제천 – 불광천

평균 속도: 5km

누적거리: 3,600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이틀 전에 딸이 손주들을 데리고 집으로 쳐들어왔다. 두 아이 육아로 지쳐서 쉬러 온 것이다. 갑자기 집안이 정신이 없다. 아내와 둘이 조용히 살다가 손주들과 딸이 함께 북적거리며 지내니 집안은 엉망이다. 하지만 그런 시끄럽고 정신없는 상황이 우리를 생동감 있게 만든다. 손주들의 울음소리는 생명의 목소리고, 애교는 우리에게 베푸는 큰 보상이며, 함께 어울려 살며 가족의 소중함을 배우게 된다. 딸아이에게 우리가 비빌 언덕이 될 수 있어서 고맙고 다행이다. 언젠가 우리가 더 늙어서 아이들 손이 필요할 때가 있을 수도 있다. 가능하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지만, 내일 일은 어느 누구도 모른다. 아이들이 우리의 언덕이 되길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나마 자식이 있다는 것이 주는 안도감도 있다. 가족은 평생 서로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며 지내는 유일한 조직이다. 가족 외에 어떤 조직도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다.


상담 마치고 사천교에 내려서 집까지 약 6km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서 왔다. 천천히 홀로 걷는 이 시간은 매우 소중한 시간이다. 불광천에 접어들면서 월드컵 경기장을 지나는데 딸아이가 전화해서 손녀와 함께 불광천으로 나오겠다고 한다. 하루 종일 집안에만 있어서 답답함도 있지만, 손녀를 운동시키기 위해서 데리고 나온 것이다. 손녀를 불광천에서 만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저 멀리서 손녀가 보인다. 마스크를 쓴 손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럽고 미안하다. 나를 알아보고 뛰어오는 손녀를 달려가 안았다. 삶의 기쁨이란 바로 이런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진다. 손녀는 다시 뛰고 싶다고 했고, 나는 앞으로 달려가 손녀를 안을 준비를 한다. 손녀는 웃으며 뛰어와서 안긴다. 손녀를 만나면 웃음이 저절로 나고 목소리 톤도 높아지고 활기가 생긴다. 손주들은 우리의 사랑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만, 우리 역시 손주들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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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식과 암호화폐가 중요한 사회 이슈가 되었다. 부동산 가격의 급등과 코로나로 인한 고용의 불안정,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돈을 빨리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고 있다. 주위에는 비트코인으로 몇 억을 벌었다는 소문도 있고,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도 듣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회사를 그만두고 주식이나 비트코인에 투자를 해서 돈을 벌겠다는 얘기를 한다고도 한다. 직장생활이나 노동을 하지 않고 투자를 하며 돈을 벌고 살겠다는 얘기다. 돈은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하지만, 할 일이 없이 투자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된다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노동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한다. 노동 자체의 즐거움, 노동 후 보상의 즐거움, 그리고 노동 후 휴식의 즐거움.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그에 따른 성취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일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갈 수도 있고, 일에 몰두하며 일 자체에서 느끼는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다. 열심히 일 한 다음에 찾아오는 보상과 휴식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보상은 경제적인 보상도 있지만, 심리적인 보상도 무시할 수 없다. 주변 사람들의 칭찬과 격려, 그리고 신뢰는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일을 열심히 한 후에 느끼는 휴식의 즐거움은 삶에 활력을 만들어준다. 별로 할 일이 없는 상태에서 길을 걸을 때와, 바쁜 일정을 마친 후 걸을 때와는 같은 길을 걸어도 즐거움의 차이가 크다. 일이 비록 우리를 힘들게 만들 수도 있지만, 삶 속에서 일 자체가 없어진다면 삶의 활력 자체가 저절로 사라질 수도 있다. 스트레스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한스 셀리 (Hans Seyle) 박사는 스트레스가 없다면 우리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파이어(FIRE)족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경제적 독립 (Financial Independence)과 조기 은퇴 (Retire Early)의 첫 글자를 딴 단어이다. “국내 MZ 세대 (만 25세 – 39세) 3명 중 2명은 충분한 자금을 빨리 모아서 조기 은퇴하는 것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판 파이어족은 13억 7천만 원의 투자 가능 자금 (집 값은 제외)을 모아 평균 51세에 은퇴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조선일보, 20210405) 경제적 독립과 조기 은퇴는 누구나 원하는 희망 사항이다. 또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지출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노력을 한다고 하니 이 또한 바람직한 일이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꿈을 이루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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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미 은퇴를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은퇴 후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2019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평균 수명은 83.8세이며, 여성은 86.3세이고 남성은 80.3세라고 한다. 주변에 80세를 넘어 90세 가까운 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시기에 살고 있다. 51세에 원하는 대로 은퇴를 하고, 원하는 자금을 모아 그 자금을 잘 활용해서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만, 하루 24시간, 약 50년의 세월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주식이나 암호화폐, 부동산, 펀드, 기타 재테크를 통해 돈을 불릴 수는 있겠지만, 그런 일 외에 하는 일이 없다면 그런 삶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물론 취미 생활도 하고, 좋아하는 일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살아갈 것이다. 이런 생활이 50년 정도 매일 반복된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파이어족의 삶을 동경하고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그런 환경이 되지 못한 것이 조금 후회스럽고 안타깝기는 하다. 그래서 더욱더 파이어족을 인정하고 그런 삶을 살아가라고 응원하고 싶다. 그럼에도 한 가지, 죽을 때까지 혼자 또는 함께 할 수 있는 설레는 일을 한 두 가지 지금부터 준비해 놓지 않는다면, 파이어족의 미래는 반쪽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파이어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을 평생 설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일이 있는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뤘을 때,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이 질문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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