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270]

리액션

by 걷고

날짜와 거리: 20210903 - 20210904 39km

코스: 서울 둘레길 가양역에서 석수역까지 외

평균 속도: 4.6km/h

누적거리: 4,790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걷기 좋은 날씨다. 제법 바람도 선선하게 불고 찌는 더위는 어느덧 사라졌다. 하늘은 높고 맑다. 빗자루로 쓸어낸 땅의 정갈한 무늬가 하늘에 널려있다. 햇빛은 강렬하지만 습기가 없어서 별로 덥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햇빛은 그늘 아래로 들어가는 순간 그 힘을 잃어버린다. 나뭇잎 사이로 애처롭게 햇빛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그 애처로움이 애처롭다. 나뭇잎 그림자와 햇빛은 서로 숨바꼭질하듯 만나지 못한다. 연인이 스쳐 지나가지만 만나지 못하듯, 햇빛 역시 나뭇잎 그림자를 만나지 못한다.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애처롭다.


오전 10시에 석수역에서 길동무들을 만났다. 두 명은 여러 번 같이 걸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고, 한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났다. 오늘이 네 번째 참석이라고 한다. 나들이님과 즐길락 님 길을 걸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사람의 걷기 능력에 대한 걱정을 접었다. 걷기 동호회인 걷기 마당에서 가장 길을 잘 알고 있는 분과, 가장 험한 길만 찾아다니는 두 분의 길을 완주했다면 오늘 걷는 길은 누워 떡 먹기처럼 아주 쉽다. 거리는 길지만 모두 평지로 이루어진 오늘 길은 그냥 왼발, 오른발을 움직이기만 하면 저절로 완주하게 된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걷기 시작했다. 강변의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거세게 환영하고 있다. 거세긴 하지만 거칠지는 않다. 강물의 출렁거림도 꿈틀거리기는 하지만 거친 물보라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기분 좋은 출렁거림이다. 마치 걷고 있는 우리의 발걸음에 맞춰 장단을 맞추듯 흔들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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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걷거나 뛰고 있다. 이 좋은 날씨에 집안에 틀어박혀있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자연은 우리를 밖으로 불러내고 있고, 우리는 나가서 뛰고 걸으며 자연의 부름에 리액션을 하고 있다. 노래와 반주가 있듯이, 모든 언행에는 액션과 리액션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분위기는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한쪽이 춤을 추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 명상을 한다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면 이는 아주 무례한 행동이다. 누군가가 춤을 추면 장단을 맞추든 곡예를 하든 노래를 부르든 하며 화답을 해야 한다. 그런 힘으로 우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오늘 길을 걸으며 처음 만난 분이 있음에도 길 안내자로 묵언 수행을 할 수 없어서 잘하지도 못하는 농담을 했다. 참석자들이 모두 리액션을 알맞게 잘해준다. 리액션에 힘을 받아 정말로 농담을 잘하고 유머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또 다른 유머를 던진다. 기분 좋게 웃으며 화답한다. 유머가 이 말을 들으면 비웃을 것이다. 유머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기반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웃음이 우러나올 수 있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분위기를 잘 맞추거나 맥락을 잘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가끔 모임에서 말을 하면 맥이 끊기거나 분위기를 급전직하하게 만들어 원성을 사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모임에서 말을 하기보다는 듣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참석자들이 모두 너무 착하거나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지 않은 한 리액션을 그렇게 적절하게 잘할 수가 없다. 리액션도 넘치면 오히려 분위기를 망칠 수가 있다. 사실에 근거한, 또는 어떤 상황에 근거한 적절한 리액션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오늘 참석한 분들은 리액션 학원에서 최소한 강사 이상의 자격을 지닌 분들임에 틀림없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아무 말이나 던져도 그 막말을 받아서 아름다운 웃음과 리액션으로 다시 돌려준다. 기분이 무척 좋아진 나는 이제는 아무 말이나 하며 웃음을 유도한다. 그럼 이번에도 그 유도를 기꺼이 받아서 멋진 리액션으로 돌려준다. 좋은 분들을 만나 행복했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의 멋진 리액션은 유머에 대한 나의 자존감을 매우 높여줬다. 이분들과의 만남이 기다려진다. 그리고 이분들이 진정으로 나의 유머 같지 않은 말을 유머로 받아들이길 기대하며 요청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다시 유머 파괴자가 되어 자존감이 무척이나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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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다. 그들의 따뜻하고 적절한 리액션은 내가 유머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처음 만난 사람이든 자주 본 사람이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리액션은 매우 중요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임인 걷기 동호회 걷기 마당에서도 리액션은 매우 중요하다. 누군가가 공지를 올리거나 후기를 올리면 그에 맞는 리액션을 해 준다면 올리는 사람은 신이 나서 길을 찾아다니고 멋진 후기를 쓰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처음 가입한 사람이 가입 인사를 할 경우 환영하는 댓 글을 쓴다면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참석해서 우리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눌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말을 하든 그 말에 좋은 리액션을 한다면 그 사람의 리액션은 더욱 적극적인 활동으로 표현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듣기에 불편한 말을 해도 좋은 리액션을 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의 말투에 변화가 발생할 것이다. 상황에 적합한 리액션은 우리 모두의 삶을 훨씬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 욕구를 지니고 있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인정과 사랑의 표현이 바로 리액션이다. 인정과 사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을 잘 지켜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한 사람의 살아온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할 수가 없고 관심도 쉽게 사라진다. 이해를 위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의 편견과 고정된 틀을 깨기 위한 고통스러운 노력이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인정과 사랑을 적절하게 표현하게 되면 즉 리액션을 적절하게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척 아름다울 것이다.


오늘이 내 음력 생일이다. 집 안에서는 음력 생일을 지내는데 금년부터는 생일 음식을 차리거나 모임을 하지 말자고 했다. 그럼에도 딸이나 사위가 전화를 하지 않아 조금 서운한 마음이 잠시 들었다. 노화 현상의 아주 좋은 실례(實例)이다. 생일 모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축하 인사를 하지 않으면 서운해한다. 그 마음을 접고 걷고 있는데 딸이 전화를 해서 축하한다고 했다. ‘말로만?”, “아빠, 입금했어!!”, “오우, 땡큐!!”. 참 쿨한 부녀 지간이다. 자연스럽게 오늘 참석한 사람들에게 생일을 공개하게 되었고, 입금된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생일 자축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석수역에 도착할 즈음에 시간 되면 차 한잔 하자고 했다. 모두 다른 일정이 있단다.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커피 한잔 대접하려는 나의 액션에 대한 리액션이 기대와 다르게 나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들이 오늘 베푼 리액션이 충분히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다음에 만나면 그들의 따뜻하고 수준 높은 리액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차 한잔 대접할 생각이다. 원하는 리액션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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