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306]

두 발의 고독

by 걷고

날짜와 거리: 20221213 13km

코스: 한강공원과 월드컵 공원 외

평균 속도: 3.83km/h

누적거리: 5,625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뇌전증에 걸렸다. 자동차 열쇠를 없애버렸다. 나는 과거와 완전히 다른 새 사람이 되었다. 어디든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실제로 그것은 해방된 삶이었다. 이것은 계시이자 구원이었다.” (본문 중에서)


최근에 읽은 책 ‘두 발의 고독’의 저자는 뇌전증에 걸린 후 자동차를 버리고 걷기 시작했다. 일상에 필요한 물품을 담은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서 다녔다. 심지어는 맨발로 걷기도 했고, 익숙한 길은 눈을 감고 걷기도 했다.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빨리 걷기도 했고, 집 주변을 걷거나 장거리 도보 여행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눈이 많이 내린 후에는 눈에 찍힌 동물들의 발자국을 쫓아다니며 동물들의 길을 탐구하기도 했다. 그의 걷기는 질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질병 덕분에 그는 해방되었고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걷기를 시작하는 동기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길에서 만난 길동무들은 대부분 걷기 시작한 삶의 계기가 있다. 질병 치료 후 회복을 위해,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외로워서, 우울감이 심해서, 가족 간병으로 지쳐서, 사업 실패 후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은퇴나 퇴직 후 인생 2막을 준비하기 위해, 자식들의 투병을 지켜보기 힘들어서,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서 등 각자 간절한 사연이 있다. 삶 속에서 부정적인 경험을 하며 심신이 지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걷기 동호회 활동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매우 소극적이고 근심 가득한 사람들의 태도와 표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으로 변하는 것도 많이 지켜보았다. 걷기는 심신 건강의 유지와 회복에 효과가 있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매우 쉬운 운동이다.


걷기는 단순한 신체 운동이 아니다.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몸이 먼저 회복되면 마음도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되살아난다. 그 이유가 바로 ‘삶의 주도권’이라고 생각한다. 잠재되어 있던 내면의 힘이 스스로 판단하고, 자발적으로 문 밖으로 나와 걷게 만들며, 회복을 돕는다. 걷기 모임을 소개해 줄 수도 있고 같이 걷자고 얘기를 할 수는 있어도, 억지로 걷게 만들 수는 없다. 소를 물가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만 자신의 몸에게 명령을 내려서 걷게 만들 수 있다. 심신의 소진 역시 자신이 만든 것이기에, 회복 역시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걷기’는 자신이 ‘삶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는 매우 좋은 방법이다. 걷기 위해 문을 박차고 나오는 일, 한발 앞으로 내딛는 일, 반복적으로 두 발을 움직이는 행동을 하는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주인’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는 행동들이다. 수동적이고 의타적이고 포기한 삶을 능동적이고 자립적이며 자신의 삶을 찾아가게 만들어 주는 ‘자기 개혁’의 방편이 바로 ‘걷기’다.

‘걷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이 필요하다. 집 문을 나서면 수많은 길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집 근처에 가까운 전철역이 두 곳이 있다. 예전에는 D역으로 자주 갔었는데, 요즘 재개발 중이라 길이 복잡하고 불편해서 J 역으로 가는 편이다. J 역으로 가는 길도 여러 길이 있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선택한다. 길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그러니 길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거나 길을 만들고 조성한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다. 오히려 그 에너지를 어느 길로 가는 것이 편하고 좋은지를 선택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길이 변하고 사라지고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불편하다고 집안에만 머물 수는 없다. 자신의 할 일은 ‘길’과는 전혀 상관없는데도 가끔은 ‘길’에 대한 변명과 불편함을 호소하며 자신의 은둔을 합리화시키기도 한다.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변하는 것이 ‘길’의 사명이자 역할이다. ‘길’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자 책임이고, 그 ‘길’을 걷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다.


‘길’은 일반적으로 ‘통행로’를 의미한다. ‘길’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만들어졌고, ‘길’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누군가가 그 길을 앞서서 걸었다. 앞서서 걷었던 사람이 있기에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길’은 역사다. ‘길’이라는 단어는 ‘삶’의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 역시 매 순간 선택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과거에 내린 선택과 결정의 최종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나’이다. 지금 내린 선택과 결정의 최종 결과물이 바로 ‘미래의 나’가 된다. 문 밖을 나서면서, 다시 얘기하면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수많은 길 중에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해서 한 길을 선택해서 걷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 나가고 수정하고 보완해나간다.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길이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지듯 우리네 삶도 시행착오를 통해 서서히 균형을 잡아간다. 선택의 결과가 두려워서 선택을 하지 못하거나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

삶은 ‘오류성’과 ‘상호작용성’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오류성’이란 인간은 불완전하며 세상을 인지하는데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어서 전체를 볼 수 없고 부분만 본다는 의미다. ‘상호작용성’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행동한다는 의미다.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다. 자신의 오류를 비추는 거울이 바로 주변 사람들이다. 오늘 걸은 길이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니라면 다른 길을 선택하면 된다. 굳이 그 길을 고집할 필요가 전혀 없다. 동시에 길 위에서 만나는 길동무들을 통해 배우기도 하고 길동무라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며 오류를 바로 잡을 수도 있다. ‘오류성’과 ‘상호작용성’의 과정이 바로 수양이고 성숙이고 익어가는 과정이다. 익어가기 위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걸어야 한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것은 살기 위한 수동적인 숙명이지만,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는 능동적인 자신만의 결정이다. 자신이 유일한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 좋은 문구가 있다. 그 문구 중 ‘개울’을 ‘삶’으로 바꾸어 읽어보니 삶의 지혜를 읽을 수 있다.


“개울과 길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둘 다 동일한 작동 원리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개울은 힘들이지 않고 지형을 헤치며 나아간다. 그리고 똑바로 일직선을 그리며 흐르지 않는다. 또한 가장 짧은 거리나 빠른 길을 골라 가지도 않는다. 개울은 저항을 최소한으로 받는 길을 따라간다. 물은 평형상태를 추구한다.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흐른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개울은 흐름을 멈출 것이다. 그래서 개울은 호수를 만나면 사라진다. 강 또한 바다를 만나면 흐름을 멈춘다. 물은 평형상태에 도달하면 속도를 잃고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평형상태에 도달한 물은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이것은 길도 마찬가지다.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은 이제껏 함께 걸었던 발걸음을 멈추고 저마다 자기 방향으로 흩어져가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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