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피로를 많이 느낀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우스갯소리가 기억난다. 정해진 일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어딘가 출근해야 하는 사람도 아니고, 누가 무엇을 하라고 지시한 일도 없는 백수인데 몸은 피곤을 호소한다. 최근에는 약속 세 가지를 취소했다. 억지로 나가면 지킬 수 있는 약속이지만 몸이 피곤해서인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핑계를 대고 약속을 취소하고 연기했다. 그리고 한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인데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취소하는 모양이 이기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요즘 자신을 살펴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못난 모습을 발견하며 속을 태우고 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보여서 스스로에게 실망하며 마음이 불편했다. 꼴 보기 싫었던 남의 언행이 실은 나의 모습인 것을 알게 되면서 그간 헛 살아왔고, 마음공부한 것이 모두 도로아미타불이 된 느낌이 들어 마음이 많이 불편하다.
타인의 모습을 통해 마음공부를 하고 있다. 남 탓하던 습관은 없어졌지만, 대신 자신을 탓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자신을 탓하는 대신 마음이 불편한 지점에서 그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연습을 한다. 불편함에 매몰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불편한 마음의 원인을 찾으려 시도하지도 않고, 감정에 대한 평가나 판단도 내려놓고 그냥 바라만 본다. 불편함을 안고 바라보고 일상 활동을 한다. 때로는 저절로 사라지기도 하고, 때로는 제법 오래 머무는 놈들도 있다. 이런 놈들은 그냥 안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계속 머문다면 그놈을 안고 걷는다. 걸으며 소리에 집중하기도 하거나 몸의 감각에 집중한다. 그리고 불편함을 바라본다. 불편함이 다른 불편함을 만들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냥 바라본다. 어쩌면 약간의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는 것도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너무 빈 공간보다는 불편함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뭔가 할 거리가 있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이 역시 잡념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그냥 그렇게 보낸다. 언젠가는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다. 불편함으로 인해 두 번째 불편함이 발생하지 않으면 이미 충분하다. 부처님 말씀대로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으면 된다.
최근에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피곤함을 느끼고 있는지 돌아본다. 경기 둘레길을 길동무들과 함께 완보했다. 길 안내자로 길동무들을 이끌고 1년 3개월 간 거의 매주 주말 함께 걸었다. 실은 길동무들이 나를 이끌고 다녔지만, 그럼에도 공식적인 길 안내자라는 부담은 안고 걸었다. 완보 후 당분간 활동하고 있는 걷기 동호회 활동을 쉬고 싶었다. 근데 한 길동무가 대마도 트레킹 자료를 열심히 준비해서 함께 가자고 제안하는 것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13명과 함께 이 길을 다녀왔다. 다행스럽게 아무런 사고나 없길 망정이지 리더로서는 꽤 신경 쓰이는 트레킹이었다. 산행 시간도 길었고, 산속에서 어둠을 맞이한 것도 불안했다. 그럼에도 함께 간 길동무들은 매우 흡족해하는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후미를 보며 걷다가 넘어지면서 손목과 허리에 충격이 왔다. 지금 허리는 거의 다 나았지만, 손목의 통증은 여전하다. 몸이 불편하니 마음도 따라서 불편해진다. 그리고 그제 걷기 동호회 활동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길 안내를 했다. 평소에 좋아하는 길을 길동무들과 함께 걸어 즐거웠다. 당분간 길 안내자 활동을 쉬기로 결정했다.
걷기 활동 외에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상담을 한 사례 매주 진행하고 있다. 주 1회 이상 채용 면접관으로 면접을 진행한다. 책 발간을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브런치 출간 프로젝트에 응모를 마쳤고, 요즘은 전에 써 놓았던 ‘금융 문맹 탈출기’ 원고를 정리해서 출간 기획서를 준비하고 있다. 거의 마무리되었고, 추석 연휴 이후에 출판사에 투고할 계획이다. ‘나는 왜 걷는가?’라는 주제로 그간 써 놓았던 글을 정리하고 있고, 예전에 사람들이 걷는 이유를 직접 인터뷰해서 정리해 놓은 글을 다시 다듬고 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지금 멈추었다.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피곤함 때문에 더 이상 작업이 진행되지 않아서이다. 일주일에 이삼일 정도 손자 클리닉 픽업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 일들을 한꺼번에 진행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친 것 같다.
지난 일요일 걷기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몸에 이상한 징후를 발견했고, 결과적으로 대상포진 판정을 받고 약을 복용 중이다. 그나마 빨리 발견해서 다행이다. 몇 년 전에 대상포진으로 고생했고, 그때 약 복용과 함께 예방주사를 맞았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예방주사를 맞은 덕분에 그나마 통증이 별로 없다고 한다. 몸의 불편함은 있지만, 통증은 없어 다행스럽다. 실은 며칠 전부터 몸은 피곤하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는데, 그 신호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흘려보냈다. 그나마 몸의 얘기를 들으며 약속을 취소했던 것은 상대방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잘 내린 결정이었다. 몰아치듯 제법 많은 일을 동시에 진행해 왔었고, 이제 잠시 걷기 동호회 활동을 멈춘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서 그간 감추고 있던 피곤함을 몸이 대상포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몸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추석 연휴가 다가온다. 그냥 편안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도 되는데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빌릴까? 무엇을 하며 지낼까라는 생각 등으로 머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있다. 양가도 들려 차례도 지내고, 아이들이 찾아오면 같이 보내야 한다. 그럼에도 뭔가를 더 하지 않으면 소모형 인간이 된다는 강박을 갖고 있나 보다. ‘잉여인간’이라는 단어를 보고 기겁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냥 편안하게 쉬어도 되는데 뭔가 할 일을 찾거나 만든다. 이번 연휴에는 그냥 편안하게 쉬어보자. 강박으로 인해 무리해서 무언가를 하는 행위는 자신과 가족에게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강박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또 가정적으로 도움 될 것이다. 아내는 우리 집과 딸네를 번갈아가며 집안일과 손주들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아내를 보면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지금-여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묵묵히 할 일을 한다. 힘들 만도 할 텐데 힘들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 많은 일을 해낸다. 그리고 누우면 바로 깊은 잠에 빠진다.
아내는 가정을 위해 자신을 혹사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있다. 이기적인 모습을 아내를 통해 또 한 번 확인한다. 아내에게 미안하다. 하고 싶은 일을 굳이 만드는 것보다 바로 ‘지금-여기’에 주어진 일을 하면 된다. 그것이 마음공부이고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아내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실은 별 의미가 없는 이기적인 행동에 불과할 뿐이다. 대상포진은 추석 연휴를 아내와 가정에 충실하게 보내라는 고마운 선물이다. 덕분에 금주할 수 있고, 조금 더 가정적인 가장과 남편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반가운 손님이다. 대상포진아 고맙다!! 근데 앞으로는 다시 만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