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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틴의 힘

by 걷고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김하성 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 최고 수비수에게 주는 ‘골드 글러브’를 받았다. 기분 좋은 소식이다. “실패할 때마다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고 멘털이 깨진다. 이를 이겨야 하는데 방법은 그나마 루틴인 것 같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이어가다 보면 버틸 힘이 된다.” 그가 고교 후배들에게 한 조언이다. 루틴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말이 크게 와닿는다. 지금 나의 상황과 많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어떤 목적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한다. 목적이 결과물이 되기를 바라며 노력한다. 수능 점수를 잘 받기 위해 공부하고, 진급하기 위해 열심히 근무하고, 인기 연예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이들의 노력을 부인하거나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노력의 결과물을 얻어낸 그들의 노력과 의지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이들에 대해 답답함, 연민,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이들이 좋은 대학 입학, 진급, 유명 연예인이 되지 못한다면 이들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노력 자체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마저 사라진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 자신이 바로 원하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공부가 좋아서, 하는 일이 좋아서, 노래나 연기가 좋아서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들을 보는 나의 마음은 무척 기쁠 것이다. 물론 나의 기쁨과 그들의 성취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목적이 결과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과정의 부산물이 결과물이 된다면 훨씬 더 삶은 아름답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김하성은 야구선수라는 확실한 정체성이 있다. 그는 자신 소개를 할 때 당당하게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은 그 정체성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 정체성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수많은 역경을 견뎌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력보다 그가 누리고 있는 결과물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과정 없이 결과물이 나올 수는 없다. 무엇보다 힘든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야구에 대한 또는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 열정과 사랑이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뿌리가 되고, 뿌리가 튼튼하게 자라서 무성한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연습, 즉 루틴이 필요하다.


현역의 경우에는 당연히 더 훌륭한 선수, 직장인, 연예인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일단 현역에서 물러나면 다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기존의 정체성을 부수고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고 찾아야 한다. 자신이 현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 과거에 매달리거나, 과거의 무용담을 펼치거나, 과거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모습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또는 할 일을 찾지 못해 방황하거나 스스로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며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 약 50년 이상 살아온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남은 삶이 30년 이상이 된다면 그 삶을 잉여인간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현역에서 물러난 지난 11년간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딱히 무언가를 이룬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늘 무언가를 하며 지냈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상담 심리사가 되었다. 공부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지만, 억지로 버티며 하나의 결과물인 상담심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자격증 취득 후 편안한 삶이 이어질 줄 알았지만, 현실의 벽은 높고 두꺼웠다. 좌절감을 맛보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인생 2막, 명상, 온전한 대화, 걷기 명상 등 내가 할 수 있는 강의안을 만들어 여기저기 제안했고, 강의를 하기도 했다. 걷기와 명상을 꾸준히 하며 심신 치유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여러 번 시험 운영을 하기도 했다. 책을 세 권 발간하며 나를 알리기 위한 노력도 했다. 다양한 SNS 활동을 하며 글과 사진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리고 천천히 ‘이휘재 심리상담 센터’ 오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미 한 내담자와는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아직 사업자등록증을 내지도 않았고, 장소도 없는 상태다. 다만 블로그를 정리하며 오픈 준비를 하고 있다.


11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지도 않고 쉽지 않은 좌충우돌 시기였다. 희망과 좌절, 자신에 대한 실망과 기대, 하고 싶은 일과 현실과의 괴리,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에서의 힘든 경험들,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살아야 된다는 각오, 노력해도 찾아오지 않는 결과와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상황 등.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죽음만을 기다리며 지낼 수는 없었다. ‘나’라는 사람을 알리고 싶은 마음과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의 충돌도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인지, 아니면 돈벌이 수단인지 구분이 되지도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결국 경제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답답함과 누리고 싶다는 희망이 만들어 낸 상황들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욕심을 하나하나 버리기 시작했다. ‘나’라는 사람은 여전히 있지만, 주변에서 인정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그냥 ‘나’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많아졌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욕심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부수적으로 수입이 생기면 그 수입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걱정하고 안달한다고 안 될 일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걱정할 일도 많이 줄어들었다.

힘든 상황 속에서 나를 지켜준 것이 나만의 루틴이다. 할 일이 없을 때 한 일이 ‘걷기’다. 걸으면 생각이 떠오르고 그 떠오른 생각을 글로 정리해서 다양한 SNS에 올리고 있다. 이제는 글쓰기가 든든한 친구가 되었다. 명상도 도움이 되었고, 걷기 동호회 활동도 도움이 되었다. 요즘도 아침에 일어나면 글을 쓰고 걷기를 한다. 오후에는 상담 전공 공부를 하고 꾸준히 독서를 한다. 걷기와 글쓰기가 나를 지켜주었고, 나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 힘 덕분에 상담을 계속해서 할 수 있게 되었고, 좀 더 전문적인 상담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다. 책을 읽고, 읽은 내용을 걸으며 정리하고, 정리된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 일상의 모든 경험들과 생각들이 글감이 된다. 누군가는 왜 걷고 글을 쓰느냐고 묻는다. 걷는다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전문 작가도 아닌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할 일도 없고, 시간에 치이며 살기 싫어서, 그냥 걷고 글을 쓰고 있다.”


그렇다. 지금 나는 아무런 생산성도 없는 걷기와 글쓰기를 하며 지내고 있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읽는 글도 아니다. 그럼에도 무의미한 이 일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무슨 가치가 있냐고? 또는 왜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또 대답할 것이다. ‘할 일이 없어서 하고, 시간에 치이며 살고 싶지 않기 때문. “이라고. 누구를 위해 걷는 것도 아니다. 독자를 위해 쓰는 글도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나의 행동들이 내게는 의미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걷기와 글쓰기는 좋아하는 일이다. 이제는 유명 코스도 별 의미가 없다. 시내도 걷고, 집 주변 개천도 걷고, 뒷동산도 걷고, 남파랑길과 해파랑길도 걷는다. 발이 닿는 모든 곳이 바로 길이고, 나는 길을 걷는다. 누구를 위해 걷는 것이 아니고 그냥 걷는 것이 좋아서 걷는다. 그러다 보니 심신이 지친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


글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독자를 의식하며 쓰지 않기에 자유롭게 나의 상상과 생각과 경험을 써 내려간다. 언젠가 이 글들을 보며 웃음 지을 날이 올 것이다. 나를 위해 글을 쓴다. 할 일이 없기에 쓰고, 더 늙은 후 내가 쓴 글을 읽으며 웃을 수 있기에 쓴다. 가끔 나의 글을 읽고 고맙다는 댓글을 달아주는 분들이 있다. 단 한분이라도 이런 댓글을 남겨 주시면 힘이 된다. 어느새 나의 글을 읽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글을 조금 더 신중하게 쓰려고 노력한다. 스스로 후회되는 글을 남기고 싶지 않고, 또한 나의 글을 읽는 단 한 분의 독자를 위해서 그렇게 쓴다.


최근에 ‘금융 문맹 탈출기’라는 전자책을 발간했다. 금융 문맹으로 답답했던 내가 경험하고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서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이다. 어떤 사람은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이런 책을 쓰느냐고 은근히 질책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선물했지만 단 한 페이지도 읽을 마음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냥 기념품으로 간직하라고 얘기한다. 나를 위한 책이다. 그리고 그 책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단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미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단 한 사람도 읽지 않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앞으로 나는 매년 한 권의 책을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계속해서 작업할 것이다.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주변 사람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


사회에 대한 또는 사람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역설적인 표현일 수는 있겠지만 사실이다. 내가 관심과 희망을 갖고 있지 않으면 상대방도 또 사회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서는 상관없다. 오히려 홀로 떨어진 듯 살아가는 자발적 고독 속에서 참다운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면 저절로 자유는 드러난다. 홀로 걷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도, 또 글을 쓰는 이유도 나만의 자유를 느끼는 방법이다. 그런 면에서 할 일이 없다는 것은, 특히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오히려 나 자신에게 참다운 자유를 선물해 주고, 내가 좀 더 나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다. 욕심만 버리면 된다. 그리고 자신과 친해지면 된다. 자신과 친해지면 외롭지 않다. 욕심만 버린다면 더 이상 추구할 것도 없다. 내가 걷고 글을 쓰는 이유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루틴이 내게 자유를 선물해 줄 것이다. 혹시 나처럼 할 일이 없는 사람, 또는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르는 사람, 온갖 시련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 삶의 길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 하루에 단 10분 만이라도 혼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 시간을 만끽하길 바란다. 그것이 루틴이다. 루틴은 모든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고, 삶을 회복시켜 주며, 자유를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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