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 don’t tell” 이라는 유명한 내러티브나 “Talk is cheap, show your code” 같은 대사가 마음에 들었던 건 일하는 나의 모습도 주변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추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약간 기출변형으로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 되자”라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여기에는 적극성과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능력, 추상화를 잘해서 설명하는 능력 등이 포함되어있었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에 온지 2개월 되어가는 지금, 나는 업무에 대해 꽤나 큰 부담과 긴장을 느끼고 있다. 이 불편한 마음을 지난 주에 들여다 봤을 땐 원활하지 않은 커뮤니케이션이 큰 부분이구나 싶었다. 지난 주 일기를 다시 읽어보니 사실 근본적으로는 마음 가짐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알아서 잘 하는 사람은 뭘까. 전통적인 소프트웨어 개발 경험이 없는 나는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는 룸메에게 “개발을 잘 한다는 게 뭐냐?”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망설이지 않고 아주 추상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를 던져주면 그 문제를 기술 문제로 치환하고 어떻게든 해결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장인과 도제 관계를 생각하고 갔던 미국 대학원에서도 잘하는 사람은 결국 원래 알아서 잘 하는 사람들이 여기 와서도 지도교수의 큰 도움 없이 알아서 잘 하는 곳이라는 걸 직간접적으로 관찰했다. 구체적인 업무 지시를 실행 하는 것도 조직의 일원으로서 큰 덕목이지만, 어째 기본적인 소양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굳게 자리 잡았다.
나도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은 좋은 성장 동력이 되긴했다. 지난 회사 연말평가에서 ‘기대치 이상의 성과를 내셨습니다’를 의미하는 4점을 받은 건 아직도 마음이 뿌듯하고, 학부에서 문과를 하고 지금은 기술의 중심지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도 문득 스스로 기특하다. 반면에 회사일이 쉽지 않게 느껴지는 요새는 그런 욕심이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걸 느낀다. 두 달 새 벌써 두번이나 내 매니저격인 CTO가 사실상 내 업무 진척에 대해 답답해하는 걸 느꼈다. 대기업에 다니는 다른 룸메는 자기는 3개월이 지나서야 코드에 손대기 시작했다며, 너가 페이스가 빠른 스타트업에 있어서 그런 과도한 부담감을 느끼는 거라며 위로같은 말을 해줬지만 알아서 잘하지 못했다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따져보면 내가 입사해서 내가 맡은 업무에 대해 같이 얘기나눈 시간이 너무 적어서 내 역할을 파악할 기회가 부족했다, 중간에 있는 다른 동료가 이 프로젝트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두 명의 이야기를 듣는 내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위로할 이유도 찾았지만 알아서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그런 말은 다 변명이라고 생각해서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걸 깨달은 나는 마음을 바꿔 먹고 스스로를 달래기로 했습니다라는 아름다운 힐링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다. 나는 더 밀어부치기로 했다. ‘아이고 답답하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CTO와 대화할 때 내 감정이 그 사람 말을 곡해하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 사람이 푸념처럼 풀어놓는 업무 방향을 기억했다. 한 달 뒤쯤 있을 대화에서는 흐뭇한 미소를 보고 말겠다는 목표를 가졌다. 이러한 태도는 어째 아직 개발도상국같은 태도같이 느껴지지만, 나는 킵고잉킵시발 개도국 마인드에 있을 때 많은 발전을 했다. 그럴 때 오는 힘듦보다 따라오는 성공시 따라오는 뿌듯함이 더 크고,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하는게 열심히 하지 않는 것보다 과정도 더 재밌다.
그래도 나는 30대니까 태도만으로 밀어부치지는 않기로 한다. 내가 알아서 잘 하지 못했던 이유를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1) 프로젝트 계획서를 면밀히 작성하지 못했고 2) 프로젝트 진척 상황을 정기적으로 공유하지 못했고 3) 주변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얘기하는 자리를 가지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1)이다. 사실상 답답해하던 CTO가 결국 구체적인 액션 아이템들을 나한테 던져줬다. 하.. 알아서 잘하고 싶다는 욕심만 많은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지만 그걸 바탕으로 무슨 일들을 언제까지 어떠한 내용으로 진행하고 그 결과물로는 뭘 전달한다를 프로젝트 계획서에 구체적으로 적을 수 있었다. 그런 내용이 들어가니 프로젝트 계획서가 제법 마음에 들고 공유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구체적인 질문들 추가로 달아 CTO에게 코멘트를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당신이 내 일을 해준 것 같이 느껴지는데, 다음 번에는 내가 더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성장하겠다라고 점잖게 가다듬은 개인적인 느낌도 덧붙였다. 계획이 또렷하니 일이라는 건 상쾌하게 실행만 하면 되는 것들이었다. 어제는(어제'도' 아님) 한시까지 생산적인 코딩을 하고 잤는데 오늘 7시에 눈을 뜨는 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늘 느끼지만 일이 많은 건 문제가 아니다 잘 안 되는 일이 많은 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