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물이었다.
나는 욕조가 있는 집에서 자랐다. 태어나고 보니 우리 집은 33평짜리 신축 아파트였고 방은 세 개, 화장실은 2개가 딸려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평범하디 평범한 그 집을 사고 내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 언니를 포함한 세 가족은 구축 아파트 1층에서 살다가 네 가족이 될 걸 대비해 신축 아파트 5층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방이 하나 더 생기는 것 말고 큰 차이가 없지만, 엄마 아빠에게 ‘새집’은 성공의 상징이었다. 27년째 똑같은 집에서 사는 지금까지도 집 얘기만 나왔다 하면 라면만 먹던 우리가 아파트에서 소고기를 썰고 있다며 흥분한다.
신이 난 부부는 이사할 곳의 톤에 맞추어 가구를 모두 새 걸로 바꿨다. TV, 냉장고, 책장, 이불 세트, 식탁, 장판, 벽지, 수저, 그리고 욕조까지. 사람만 빼고 다 갈아엎은 그들은 경제적 여유가 이 정도나 된다는 듯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4kg짜리 아기를 조심스럽게 감싸 나무 냄새가 나는 요람에 눕혔다. 갓난아이였던 나는 태어나자마자 새것, 가장 좋은 것, 비싼 것에 둘러싸여 있었다. 부모의 의도는 훌륭했으나, 늘 계획처럼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게 신상인 우리 집에서는 일산화탄소, 미세먼지, 진드기, 그리고 발암물질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집에서 제일 면역력이 약한 나의 눈, 코, 입에 그대로 들어갔다.
모든 게 새것인 이 집이 정작 새 아기는 반겨주지 않았고 베이비파우더 향기가 나던 몸에서는 진물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가려운 부위는 나와 함께 자랐고, 내가 아픈 만큼 엄마도 바빠졌다. 나는 엄마의 얼굴로 감정을 배웠다. 긁느라 잠들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는 근심과 죄책감이 있었다. 칭얼거리는 내 손을 찰싹 때릴 때는 짜증이, 잠에서 한 번도 깨지 않은 날에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다. 엄마는 감정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걱정은 꿀, 피톤치드 베개, 섬유유연제, 방문 판매 화장품 사재기로 드러났다. 역시나 별 이득은 없었다.
엄마와 나는 매일같이 반신욕을 했다. 욕조기를 따뜻한 물로 한가득 채우고 엄마가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그의 반만 한 내가 위에 눕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서로의 나체를 포갠 상태로 각자의 책을 읽고, 웃긴 구절을 따라 할 때면 말소리가 화장실에 울려 퍼졌다. 그게 그렇게 듣기가 좋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선물하고 싶은 문장을 아나운서처럼 또랑또랑하게 읽었는데, 음절과 높낮이가 다듬어져서 그런지 포근하게 들렸다.
욕조기는 역시나 신식이라 50도든 60도든 기호대로 맞출 수 있는 기계였다. 우리는 항상 45도 정도로 맞추고 책 이야기를 했다. 물속에서 엄마는 친절했다. 그는 철저하게 따뜻한 물을 손으로 떠 정수리에 올리면서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떤 성격인지, 어떤 등장인물을 좋아하는지, 기억에 남는 부분이 어디인지 우리는 주고받았다. 몸이 빨개질 정도로 따뜻한 욕조 안에서 속마음을 이야기할 때마다 양수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40분이 지나면 슬슬 어지럽기 시작하는데, 욕조에서 나가기 전에는 꼭 정수리 끝까지 물속에 푹 담가야 한다. 모든 모공을 따뜻한 물로 씻어 내는 건 '이제 나가야지'라는 일종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10초 정도를 잠수하고 나면 반신욕은 끝이 난다. 하지만 목욕은 심신에 좋지만 아토피가 있는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게 학계 정설이다. 몸에 열이 많으면 독소가 생길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이다. 엄마는 마음의 평화를 반신욕으로 챙기되, 피부에는 해가 되지 않게 균형을 맞췄다.
시뻘건 나체로 멀뚱멀뚱 서 있으면 시작된다. 엄마는 새빨간 대야에 녹차며 녹두며 닥치는 대로 넣고 우려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려낸 물을 손으로 일일이 떠서 내 온몸을 구석구석 씻겨 주었다. 그의 손에는 샤워기 같은 호스가 달려 있지 않아서 앉았다 일어났다 움직여 가며 내 몸의 열을 식힐 수밖에 없었다.
- 이게 몸의 열을 내려 준대, 자연이 낳은 걸 피부에 바르면 덜 가려울 거야.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거야.
우리는 그렇게 반신욕 메이트로 지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녹차를 우린 물로 내 몸을 꼼꼼하게 씻겨 주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정말로 밤에 잠을 잘 잤다. 아침 동이 틀 때까지 내 등을 긁지 않아도 되었다. 욕조에서 몸을 포개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거기는 그 어떤 고민이든, 이상한 상상이든, 다른 가족 욕이든, 뭐든 용서되는 곳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엄마와 싸우기라도 하면 싱크대에 그릇을 넣으면서 “이따 욕조에서 만나.”라고 하면 된다. 그날 화장실에서 고해성사하듯 울고 나가는 길에 화해하자는 뉘앙스로 “내일도 여기에서 만나.” 하면 알아서 의미가 전달되는 거다.
하지만 반신욕의 유효기간은 딱 열네 살까지였다. 엄마는 각종 미신과 풍수지리를 들먹이며 욕조기를 버렸다. 나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왜 없앴냐고 따지자 “어떤 의사가 이건 도움이 안 된다고 하더라, TV에서 그랬어.” 라며 신빙성 없는 가설을 들먹였다. 엄마에게 실망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사라진 게 허무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욕조에서의 추억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따뜻한 물이 주는 감각은 여전히 내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집에서는 반신욕을 할 수 없게 되자 용돈을 모아 목욕탕에 갔다. 거기서 엄마 또래로 보이는 여자들과 마주 보고 앉아 식혜를 마시거나 잠수를 했다. 거기는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소통이 되는 곳이다. 빨갛게 달아 오른 피부를 서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이 아닌 살의 색깔로 일종의 스킨 콘택트를 한다. 그러다 목욕탕이 질리면 수영장으로 향했다. 락스를 쓰지 않는 수영장을 몇 날 며칠 검색해 찾은 다음 온몸을 이리저리 뒤집으러 가는 거다.
나는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물을 찾아다녔다. 엄마처럼 내 몸을 감싸 안고 어깨를 쓰다듬어줄 물이 그리웠다. 그래서인지 샤워를 하고 나면 1시간이 훌쩍 지난 날도 허다했다. 40도 정도 되는 물줄기를 몸의 곳곳에 끼얹으면 이상하게 고민이 줄줄 나왔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실수한 거 없나?’ ‘과제를 시작도 못 했는데 어떡하지?’ ‘수영 수업은 몇 시로 바꿀까?’ ‘그 애도 나를 좋아할까?’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이번 달에 얼마나 저축할 수 있지?’ '사람은 왜 노동을 해야 하지?' 같은 거였다. 물음표가 마침표로 바뀌고 나면 그제야 샤워장에서 나갈 수 있었다.
확실한 건, 어떻게든 마침표로 바뀐다는 거다. 화장실에서도, 목욕탕에서도, 수영장에서도, 욕조에서도. 그렇게 물은 한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껴안고 걱정을 비워주고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사람의 몸은 70% 정도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나에게는 10% 만큼 더 필요했다. 그거면 나는 완전해진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