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프디 형제는 아직 '깎아내지 않은 보석(Uncut Jems)'이다.
스포일러: 약함
싼 값에 물건을 떼어 와 비싼 값에 팔아 제끼고, 나아가 시세보다 훨씬 웃도는 가격으로 팔아치우기 위해 물건을 경매에 붙인다. 지인에게 물건을 담보로 맡겨 돈을 빌린 다음, 그 돈을 앞 뒤 재지 않고 모조리 스포츠 경기 도박에 건다. 카드 돌려막기처럼 빚과 보증은 얽히고설켜 누가 누구의 돈을 빌렸고 또 누가 갚아야 하는지, 그 관계는 좀처럼 풀어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탕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몸살 앓게 만드는 주인공 하워드(아담 샌들러)는 정말이지 주변에 두고 싶지 않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 싫어하는 악질의 사나이다. 작중에서도 그는 이미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긴, 업계에서도 소문난 콩가루 보석상의 주인이다.
<언컷 젬스>는 이렇듯 비열하고 비겁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러닝타임 내내 관객이 골머리를 앓게 만든다. 하물며 그는 사랑스러운 맞딸과 장난꾸러기 두 아들을 가진, 7년 전 드레스를 세월이 무색하게 아주 멋들어지게 소화하는 미모의 여성을 아내로 둔 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러나 가장이라는 작자의 시선은 좀처럼 그의 가족에게로 가닿지 않는다. 거품을 또다시 물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남자에게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클리셰처럼 내연녀가 있다. 그녀는 그가 운영하는 보석상의 직원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마련해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오로지 한탕할 생각밖에 없는 두 집 살림의 남자, 하워드. 관객이 이 남자를 도무지 이해해주고 싶지 않은 이유는 너무나 많다.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내내 쌍욕을 퍼붓고, 길거리에서 고래고래 큰 소리로 통화를 하며, 이혼을 결심한 아내를 내내 외면하다가 당당하게 불륜 사실을 밝히는 남자라니. 믿음과 신뢰라는 단어는 하워드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차갑게 식어버린 주인공에 대한 공감 능력으로 이 영화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관객들은 그러나 일순간 그의 팀이 되고, 심지어 그를 응원하기에 이른다. 사프디 형제의 <언컷 젬스>는 바로 그런 영화다.
이 영화의 연출은 정말이지 놀랍다. 주인공을 내내 외면하고 싶게끔 만들다가, 일순간 관객들을 유리상자에 가둬놓고 그를 똑똑히 바라보고 응원하게 만든다.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남편의 외도를 내내 외면해왔던 아내처럼, 관객은 이번만큼은 그의 선택이 옳았기를 간절히 빈다. 어느 정도냐면 ‘내가 지금 이 사람을 응원하는 게 맞나?’ 싶은 정도인데, 이러한 자기모순적(?) 사고방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 하워드에게 돈을 빌려준 아르노(에릭 보고시안)와 하워드를 쫓아 달려온 사채업자들의 표정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 카메라맨은 그들의 표정을 클로즈업한다.
어떠한 도덕적 잣대를 놓고서라도 파렴치한인 주인공을 관객은 감독의 의도대로 정말이지 간절하게 응원하게 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용서를 구하는 남편을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하물며 <부부의 세계>가 히트를 치는 요즘 이 사실은 더더욱 자명하다.). 감독은 주인공을 응원한 나머지 덩달아 ‘한탕’이라는 착각에 빠진 관객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에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인상을 내내 찌푸리던 관객을 일순간 이입하게 만들었다가 다시 외면하게 만들다니. 이쯤 되면 사프디 형제는 관객을 다루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싶다.
한탕하기 위해 도박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그런 족속들에게 질려서 더 이상 이해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를 더더욱 추천하고 싶다. 오로지 물건을 더 비싼 값에 팔아치우기 위해, 물건을 다음 물건을 거래하는 데 이용하기 위해 달려온 <언컷 젬스>는 그러나 장르 영화가 아니다. 당신은 과연 수십만 달러를 눈 앞에 둔 채 브라운관으로부터 시선을 떼어낼 수 있는가? 인문학적 가치가 충분한 이 영화 <언컷 젬스>를 코로나19 사태로 개미가 된 자들에게 선사한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