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여름이 시작되었다. 섬지역답게 요란하게 비가 내리고 뜨겁게 태양이 내리쬐길 반복하며 뜨거운 계절의 꽃을 피운다. 습하고 더운 공기에 압도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은 날들의 연속이었다.특히나 저녁 밥상을 차리기 위해 매일 40분가량 뜨거운 인덕션 앞에 서야 하는 숙명은 징글맞기까지 하다.
"오늘 저녁 반찬은 뭐예요?" 주방에서 서성이고 있는 나를 향해 아이들이 돌아가며 오늘의 메뉴를 묻는다."그냥 있는 거 먹는 거지~" 인덕션 불을 최대한 짧게 쓰겠다는 나의 의지를 투영한 답변을 하고 인덕션의 전원을 킨다.
"딸, 엄마가 삼계탕 보냈어. 거기 날 더워서 음식 하기도 힘들지?"
"어머, 우리 엄마 센스 있네? 어떻게 알았어 나 음식 하기 싫었던 거?"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답변 하나로 전화선 넘어 엄마의목소리가 들떴다. 딸에게 이렇게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한 주간 엄마는 염려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칠십이 넘은 엄마의 걱정은 작고 사소한 것들에서 비롯된다. 더운 날 딸의 수고를 하루라도 덜어 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이 귓가를 타고 마음으로 내려앉았다. '고마워 엄마'
며칠 후 택배 상자에 담긴 레토르트 삼계탕 4 봉지를 보고 웃고야 말았다. 삼계탕이라기에 전문 식당에서 보냈나 생각한 나의 허를 찌른 우리 엄마. 뻑뻑한 가슴살 싫어하는 딸의 취향을 반영한 '닭다리로만' 만들어진 레토르트 삼계탕의 금빛 포장지가 마치 평생 엉뚱함을 매력으로 여기고 산 우리 엄마 같아 웃음이 났다.
앞으로 엄마의 손맛이 그리울 때면 이 레토르트 삼계탕이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것만 같다. 포장지에 담긴 닭다리 삼계탕을 냄비에 부어 보글보글 끓여낸다. 오목한 접시에 큼지막한 닭다리를 담아 아이들의 저녁 반찬으로 내어준다. 평소에 먹던 삼계탕과 맛이 좀 다르다 하면서도 맛있게 호호불어 입에 넣어 먹는다. "할머니가 너희 여름 잘 보내라고 보내주셨어. 맛있게 먹고 감사 전화드리자" 맛이 생소해도 할머니가 보내 주었다는 말에 보약인 양 한 그릇 뚝딱 먹는다, 할머니의 사랑을 먹는다.
아이들이 먹고 남긴 삼계탕의 살과 국물에 밥한술 떠 입에 넣는다. '음.. 역시 레토르트 삼계탕은 보내지 말라 해야겠어' 시판 제품 특유의 인공조미료 맛을 좋아하지 않는 나의 머리가 결론을 내린다. 그럼에도 엄마가 보내온 마음이 고마워 남김없이 싹싹 그릇을 비운다. 예전의 나였다면 엄마의 이런 마음을 일부로라도 모른 척하며 미운 소리를 입 밖으로 냈을 터였다. 이런 거 보내지 말라고, 이런 거 먹지 않는다고. 왜 다른 엄마들처럼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보내지 않냐고, 뭐든 대충 편하게 살려하는 모습이 나를 절망스럽게 한다고. 엄마에게 받은 어린 시절 상처를 그대로 돌려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엄마가 아파할까 연구하듯 비수 박히는 말을 골라 던졌을 것이다. 그러던 내가 이제야 조금씩 엄마를 이해하고 알 것 같다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아빠를 떠나보내고, 마흔 중반에 들어서 비로소 엄마의 마음이 보인다.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나서야 엄마라는 사람의 마음이 온전히 나에게 들어온다. 레토르트 삼계탕 하나에도 이렇게 엄마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