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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들과 바람 May 08. 2019

생명이 있어야 할 자리

   아침잠이 안개처럼 남아 의식을 조금 흩뿌옇게 할 때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세계 기아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책에서 1999년 기준으로 한 해 동안 3,000만 명이 '심각한 기아 상태'에 있었고 여기에 '만성 영양실조' 상태에 놓인 사람들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무려 8억 2,800만 명 정도가 되었다는 내용을 읽고 있을 때, 나는 그만 하품을 해버렸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위험한 도로를 주행 중이라 마음은 초조한데 안개는 무심히도 더 자욱해져만 가는 것처럼 나의 몸은 야속하게 나를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절망적인 상황의 크기에 대해 몸서리치는 것도 부족할 터인데, 하품을 하고 커피를 마시며 그저 책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노니 어쩌면 바로 이런 내 모습 때문에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기아문제가 끝나지 않은 것인가 자책했습니다. 내가 접했던 8억이라는 숫자는 (물론 뉴스에서 본 남의) 돈의 액수와 관련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고 그것을 구성하는 하나하나가 사람의 생명이라는 감각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화폐의 논리가 스미지 않은 구석이 없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숫자로만 구성된 정보가 가진 무력함이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생명이 1이라는 숫자에 가려지는 것에 길들여진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낭떠러지로 내모는 아프리카 군벌의 생명에 대한 극단적 무감각함이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일만은 아니게 될지 모릅니다.


   희망은 생기는 게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게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배운 희망의 원리라면, 희망은 여기에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비록 몸을 충분히 정갈하게 가누지 못한 책(責)이 있었지만, 이른 아침 이 세계의 기아 문제를 더 알고자 했던 이가 있었던 것처럼 아직 우리에겐 기꺼이 나와는 아주 먼 곳에 있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고민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 대다수는 나보다도 훨씬 더 민감한 감수성과 훌륭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은 전혀 없음에도, 같은 인간이라는 끝내 떨쳐버릴 수 없는 이유로 기꺼이 작은 책임이라도 떠맡으려는 이 사람들로 아직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수년 전, 환경운동가 제인 구달이 <희망의 이유>라는 강연 - 동명의 책이 있습니다 -을 위해 한국을 찾았을 때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강연의 주제 및 문제의식 자체는 모두가 여럿 들어본 것이고 거칠게 말한다면 그 결론도 이미 한 곳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었다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아름답고 용기 있는 말들로 듣는 우리에게도 그녀가 품는 희망의 이유들을 나누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렵게만 어둡게만 보이는데, 그럼에도 우리에게 지치지 않는 소망을 줄 수 있는 이들을 우리는 커다란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특히 멸종 위기에 놓였던 개구리의 한 종과 같이 작은 동물들을 지켜낸 젊은이들을 소개해준 장면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저는 잘 들어본 적도 당연히 관심을 가져도 본 적도 없는 그 연약한 개체들을 끝끝내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분투가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바로 그네들의 손길로 이 지구 상에서 유일무이한 생명의 한 갈래가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는 우주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을 그 생명을 기억하고 지키기 위해 헌신한 그 사람들의 노력이 잊히지 않는 울림이 되었습니다. 하물며, 각자 고유한 이야기와 영혼을 가진 사람의 생명에 관한 것이라면 그 무게는 달리 견주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한 선생님께서 '생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숫자로, 흩어지는 이야깃거리로 치환된 생명 하나하나의 무게를 온전하게 감각하려는 노력들이 모여 굶주림과, 폭력과, 공허만 있던 곳에 생명이 놓이게 되는 풍경을 그려봅니다.



[ 이미지 모두 박노해 작가의 사진.  <올리브나무의 꿈>, <별빛을 따라 귀가하는 목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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