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불이 그 불이 아니었나 보다.
꿈
처음에 불씨는 작게 일렁이며 나에게 온기를 선사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은 조금 더 자라나 어느새 불길이 되었다.
눈높이만큼 커져버린 불길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조금 물러나려 뒤를 돌아보았지만 벽에 가로막혔다.
서로 부둥켜안은 불길은, 더욱 거대하고 기괴해졌다.
더 이상 벗어날 기력이 없어 마침내 벽을 등지고 주저앉았다.
일 년에 한두 번
기억나는 꿈이 귀해 그날은 꼭 일기를 썼다.
게다가, 불꿈이라니.
며칠간 지속된 야근과 해야 할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날이면,
차례를 세우느라 잠에 들지 못했다.
끔찍하도록 힘든 날에는,
정신의학과에서 처방받은 수면유도제를 먹었다.
지독한 약기운에도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잠이 깬다.
서둘러 출근해, 세워둔 차례에 맞춰 일을 시작하고 끝마친다.
- 자기, 어디야?
- 집이지.
- 그럼, 이유를 묻지 말고 내 통장으로 천 원 보내.
- 응?
- 일단 보내봐.
- 보냈어.
- 지금 로또 명당에 가서 로또 10장 사.
- 뭐???
남편의 어이없어하는 얼굴이 눈에 선했지만,
결혼 18년 차에 그 정도는 눈을 질끈 감으면 된다.
나는 지금 움직일 힘도 없이 회사에 붙잡혀 있고,
이 귀한 꿈을 그냥 흘려보내기는 너무도 아까웠다.
김유신 장군의 둘째 동생이 언니의 오줌꿈을 사는 바람에
김춘추와 결혼해 왕후가 되지 않았는가.
- 오키
웬일로 '오키'가 쉽게 나온다.
그 덕에 김유신 장군님까지 소환하지 않아도 된다.
로또만 되면,
내 이놈의 지긋지긋한 회사 꼭 때려치운다.
점심을 거르는 것이 익숙해져
오히려 먹는 게 귀찮기까지 하다.
뼈는 앙상히 드러났고 얼굴엔 여백 없이 눈코입만 커다랗게 놓여있다.
쉴 새 없이 들이닥친 일을 해결하고, 잠시 혼자 있는 시간이 되었다.
회사에서 대인관계를 거부한 내가 존재를 입증할 유일한 방법은 '유능함'이었다.
실수를 줄이고, 완벽을 기하기.
며칠의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하루의 여파가 일주일이 갔다.
피로가 몰려와 의자를 젖혔다.
한동안 열어보지 않은 노트북이 눈에 들어온다.
짬을 내어 글이 쓰고 싶어 가져다 놓았지만,
쓸 수 있는 시간도, 여력이 없었다.
글과 그림.
내가 갈망하는 것은, 늘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눈을 감아 노트북을 외면한다.
뜬금없이 지난 저녁이 떠오른다.
중3 아들이 자꾸 냉장고 문을 열어댔다.
참, 너 저녁을 안 먹었지.
소파 위에 널브러진, 일어나지 못할 것처럼 늘어졌던 몸을 일으켜 세워,
아들과 나란히 냉장고를 뒤졌다.
냉장고의 책임자는 나인데,
마치 아닌 것처럼, 그렇게 아들과 같이 뒤졌다.
먹을 거라고는 냉동피자가 전부였다.
"와, 엄마 이거 먹으면 돼요."
오랜 헤맴끝에 금이라도 발견한 광부처럼,
아들이 활짝 웃었다.
그저 흘려보냈던 아들의 웃음이,
이제 와 나를 건드린다.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닦아냈지만,
기다렸다는 듯 울음이 터졌다.
여직원의 나이 든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멈추려 한다.
멈추려 하니 더 달리게 된다.
심호흡은 쓸데없이 더욱 큰 호흡을 불러 나를 공격했다.
손발이 몹시도 저렸고,
이러다 마비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처음 겪는 몸상태에
호흡과 함께 이성도 잃어버렸다.
"주임님, 괜찮으세요!"
가쁜 숨을 내쉬며 울부짖는 날 발견한 직원은 119를 눌렀고,
난 그 길로 구급차에 실려갔다.
"환자분, 과호흡이라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혼자, 스스로 진정해야 한다.
'과호흡'이라는 병명이 아닌 '상태'만을 진단받은 채,
그 후로도 1시간을 응급실 침대에 누워 쫓기는 짐승처럼 헐떡이다, 겨우 숨을 되찾았다.
몸과 정신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고,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불 맞네, 엠뷸런스 불빛"
남편의 한마디에 꿈에 나온 불씨가 떠올랐다.
로또는 단 한 장, 아니 숫자 한 개도 맞지 않았다.
관리자와 동료는 나를 신임했고,
부모님에게는 특별한 말썽 없는 착한 딸이었다
남편과 동등하게 가정을 이끌며,
아이들에게 남들만큼은 해줄 수 있는 조촐한 능력이 자못 만족스러웠다.
그 불씨는 처음에 내게 따뜻한 온기였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작은 힘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쓸모없는 노트북과 물감을 마음속 서랍 깊은 곳에 넣어 두었다.
모자란 능력과 나를 옭아매는 책임감으로
마음껏 쓰고 그리고 싶은 욕망을 덮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나는 그렇게 불길에 집어삼켜질지언정,
그것이 주었던 온기를 배신하지 못했다.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중년의 나는,
결국 벽을 등지고 주저앉았다.
더는 불길에 타들어가는 바보가 되기 싫었다.
끝까지 알리지 않았던 정신의학과 진단서를 회사에 제출했다.
일주일 후, 승진과 보직의 욕심을 내려놓고
주변의 시선을 뒤로한 채 2개월의 병가를 냈다.
더 늦기 전에 나만의 온기로 살아내려 한다.
꺼내든 노트북과 물감으로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