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전암 4기였습니다.

불안은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갑니다.

by 방구석 아티스트


"자전암 4기입니다"


‘자전암? 4기?’


글과 그림을 사랑하는 나는 아무도 모르게 소설가를 꿈꾸며,

아이 둘의 엄마와 직장인, 그 불완전함 사이를 위태롭게 오갔다.


술을 입에도 안 댔던 아빠는

위암에 걸려 위를 절제했고,


엄마만큼 천사인 올케언니와 25년 지기 친구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으며,


어릴 적 최고의 친구였던 사촌 동생은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했다.


가끔 건강에 대해 고민하는 날은,

이들의 소식을 듣는 사나흘이 전부였다.


어릴 적 나는 붉은색으로는 절대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계통의 색으로라도 이름을 쓰는 날에는,

장난기를 지우고 제법 신실하게 기도에 임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미신의 저주로부터 구해달라니.


무교인의 이 기도가 얼마나 우스운 행동인지 그때는 몰랐다.

그렇게 하면 죽음이 나를 비껴갈 거라 믿었다.


"4기입니다"라는 것은,

-당신은 조만간 죽습니다- 를 에둘러하는 표현이겠지.


드라마 꽤나 즐겨 본 사람으로서

행간의 의미를 쉽게 알아차렸다.


상대적으로 몸이 약한 친오빠는

차별화된 체력을 자만하는 나를 경고로써 부러워했다.


“체력 총량의 법칙이 있어. 너 그러다 큰일 난다. 운동해라”


끝내야 할 일정을 소화하고 자정을 한참 넘길 때까지 취미생활을 즐겨도,

아침이면 그 간의 피로가 깡그리 리셋되어 새로운 오늘을 기대할 정도였다.


오빠의 경고가 현실로 다가왔는지,

비 온 뒤 하늘처럼 청량한 몸으로 아침을 맞이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최대한 알람을 미루며, 스스로 타협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 일어나도 애들 등교시키기엔 늦지 않으니까.’


눈을 뜨고도 한참 동안 만근 같은 몸을 침대에 의지했다.

새벽에 회사로 출근했을 남편을 떠올리며 그가 주지도 않은 눈치를 잔상으로 만난다.


어제는 잠깐 지하철을 타고 서울을 다녀왔을 뿐인데,

마치 수면제를 먹은 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텁텁함을 죽기보다 싫어했던 내가 양치도 하지 않고,

상의는 외출복 그대로, 하의는 벗기만 하고 실내복을 걸치지도 못한 채였다.


며칠 전 정신의학과에서 받아온 수면유도제를 먹지도 않았는데,

내 몸은 꼭 그 약을 먹은 날과 같이 스위치가 꺼져버렸다.


이대로는 너무 억울하잖아.

20년 넘게 극보수 공무원 집단 속에서 겉돌며,

원 없이 해본 거라고는 눈치 보는 일뿐이었다.


글과 그림을 사랑하는 예술적 기질이 현생과 어울리지 않았던,

고귀함을 꿈꾸는 일반인.


꿈만 꾸고 이렇다 할 글 한편 완성하지 못했던

게으른 완벽주의자.


내 삶은 누구에게도 공감을 구걸하지 못할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설가라는 말도 안 되는 허상을 자책하며,

불안한 와중에 몇 글자 휘갈기며 하루 중 남은 시간을 버텨왔다.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여의사의 진단에

남편이 나를 보며 짐짓 눈물을 글썽인다.


난 그에게 미소 지어 주었고,

내 담담한 모습에 그도 조금은 안심했을 것이다.


철없는 나를 위로하며 자식처럼 돌봐왔던 그에게,

죽음 앞에서까지 짐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 사람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무언가가 덜 된, 중학교 3학년 첫째가 떠오른다.


내 사랑을 갈구하며 ‘엄마 관심받기’ 행동이 인생의 목표인 둘째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이다.


죽는 마당에 아들, 딸 걱정하는 내 모성애와 남편을 위로하는 나의 담담함이 대견스럽다가도,

자식보다 나를 구구절절이 생각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에 조용히 안도한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오롯이 혼자, 얼마 남지 않은 내 생명을 받아들여 본다.


해보기라도 할 걸, 완성된 소설 하나를 투고라도 해 볼 걸.

아무도 읽지 않은 내가 주인공인 이 글은, 소설이 아니라 일기로 끝이 나겠지.


타는 듯한 태양이 위협했던 동남아 여행에서,

폭염만큼 뜨거운 수온에 놀라, 풀장 밖으로 도망쳤다.


그 바짝 데워진 풀장 대리석 위로 내디딘 내 발자국처럼,

난 흔적도 없이 증발하겠지.


오른팔에 감각이 없다.

잠들기 전 딸아이의 머리 아래서 베개 역할을 했던 팔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이다.


팔을 빼내려고 하자 아이가 날 놓치지 않으려 품으로 더욱 파고든다.

서서히 눈 안으로 새벽빛이 스며든다.


꿈이었다.


드라마에서 악몽을 꾼 주인공처럼 눈을 번쩍 떴을까,

아니면 출연진이 자막으로 올라가는 영화의 엔딩처럼 자연스럽게 현실로 돌아왔을까.


시계를 보니, 5시 14분.

그래, 자전암이라는 병은 없지.


꿈속 비논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자전암'을 병명으로 인지하게 했다.

자전. 스스로 돌아보라는 누군가의 암시일까.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에서 깨어난 날보다

일만 배는 더 감사로 충만해져 가만히 심장 위에 손을 올려본다.


여전히 몸이 만근이었고,

눈꺼풀은 부족한 수분을 요구하듯 쩍쩍 들러붙었다.


생생한 꿈을 꾸고 나서 빙글거리며 다시 잠에 들었다가는,

꿈을 꿨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기억하는 바보가 된다.


서둘러 잠을 몰아내고

휴대전화가 있는 자리를 더듬는다.


몇 달 전, 노화의 한 현상이라는 망막박리로 인해

그 파편이 시야를 자주 가린다.


숨 쉬듯 가벼웠던 휴대전화 속 검색창을 찾아내는 것이,

이제는 조금 불편한 일이 되어버렸다.


‘암을 진단받은 꿈’

- 종종 현실의 스트레스, 불안, 또는 건강에 대한 걱정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다행스럽게도,

- 이 꿈은 곧 당신이 죽을 것을 암시합니다 – 가 아니었다.


웹사이트에 떠돌아다니는 무출처 정보이지만,

‘귀인을 만난다,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온다’는 오늘의 운세보다는 믿을만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붉은색으로는 이름도 쓰지 않았던 겁이 많은 나는, 여직 그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내 불안의 원천은 살아온 햇수와 비례하지 못한 나의 미성숙에 대한 자각이었고,

그것은 끝없는 불안의 구렁텅이 속으로 나를 내몰았다.


살아가야 하는 방식을 체득하지 못한 45년의 세월은,

내게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꿈으로써 경고하고 있다.


뇌에서 피가 돌지 않더니 몸의 말단을 모조리 물파스에 담갔다 건져놓은 듯,

감각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종국엔 모든 것이 마비될 것이다.

죽기 전에 과연 이 불안의 근원을 찾아 없앨 수 있을까?


“엄마 이 물병 어제 거야, 오늘 엄마가 넣어둔 거야?”


딸아이는 자신이 내놓지 않아 하루를 가방 속에서 묵힌 물병을,

등교 시간에 임박해 내게 보인다.


그렇게 딸이 내민 물병을 서둘러 헹구고,

정수기의 냉수 버튼을 눌러 병 가득 받다가 조금 덜어낸다.


그리고 그 위에 온수를 올려 딸이 싫어하는 ‘비린내 나는 물(미지근하다는 뜻)’로 조절한다.

“아침부터 찬물 마시면 몸에 해롭대”


입이 나온 딸에게 제법 어른 행세를 하며,

나는 일단 오늘을 살아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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